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귀감을 주는 이들이 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인,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룬 사람,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여 전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등. 그들이 남긴 말과 시련을 극복한 삶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지며 누군가의 롤모델(role model)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위인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까닭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존경하는 스승 혹은 가까운 친구인 경우도 있지만, 이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해준 사람은 대부분 가족이다. ‘가정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 ‘한 명의 아버지가 백 명의 선생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됨됨이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즉 큰사람은 가정에서 가족의 지지와 응원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의 무한한 신뢰와 격려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샘솟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오랜 벗 타고르가 지어준 별칭,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로 불리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평화운동가 간디는 인도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가 내세운 비폭력주의는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등 후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인도 서부 구라자트주의 포르반다르에서 상인 계급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유대 관계가 좋았던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성심성의껏 간병했다. 그런 그에게도 여느 사춘기 소년처럼 일탈의 시기가 있었다.
간디가 열다섯 살 때였다. 호기심에 부모 몰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그는 점점 담배에 중독되었다. 그의 집은 비교적 유복했지만 어린 그는 담배 살 돈이 충분하지 못했다. 돈이 떨어지자 담배를 사기 위해 형의 금팔찌에서 조각 하나를 떼어 내는 도둑질까지 감행했다.
순간의 유혹을 못 이겨 도둑질을 했지만,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편지에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 편지를 병상에 있는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벌을 받고 나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크게 노할 거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편지를 다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아버지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용서의 의미였다.
그날 아버지가 흘린 눈물은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간디는 다시는 남을 속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나의 아버지는 숭고한 관용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구원해주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일은 간디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그를 위대한 지도자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천재 화가, 인상파의 거장, 불꽃처럼 인생을 살다 간 위대한 화가, 강렬한 색채의 마술사,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고흐를 말하면서 동생 테오(Theo van Gogh)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성직자 집안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흐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예민하고 불같은 성격 탓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는 장남에게 거는 기대가 커 좋은 교육을 받게 했지만, 고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만은 예외였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와 사이가 각별했던 테오는, 고흐에게 단순히 동생이 아닌 친구이자 동료요 헌신적인 후원자였다.
화려한 수식어와는 반대로, 생전에 고흐는 화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였다. 그는 화랑 직원, 교회 보조 교사, 책방 점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쳐 27세의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7세에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약 10년 동안 유화 900여 점, 드로잉 1,100여 점을 남겼다. 고흐가 짧은 기간에 온 열정을 불태워 주옥같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테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흐의 예술 감각을 알아본 테오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형이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편지로 소통하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고흐는 테오에게만큼은 자신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좌절과 회의감에 힘들 때면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테오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둘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무려 700통이 넘는다.
“내 작업이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절반은 네 공이다. 너는 그만한 권리가 있다.”
-1885년 4월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분명 형은 살아 있을 때 성공을 거두게 될 거야.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형의 아름다운 그림들 때문에 저절로 이름이 알려지게 될 거라고.”
-1890년 1월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 中
고흐가 세상의 외면과 가난, 정신질환 등 어려움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테오.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는 유명한 화가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아들은 비밀결사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게 끌려가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아들을 면회 온 어머니는,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일화다.
김구(1876~1949) 선생은 의병 활동과 계몽운동을 벌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일제의 감시와 열악한 환경, 자금난 등으로 임시정부의 운영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에게, 대한민국은 그가 서거한 지 13주년이 되는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김구 선생이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남기까지, 그의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강하고 씩씩한 어머니이자, 애국정신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곽 여사는 객줏집 식모살이와 삯바느질을 하며 김구 선생의 옥바라지를 했고,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빈 젖을 물려가며 어린 손자들을 키웠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곽 여사의 강직한 기개는 때로 김구 선생을 부끄럽게 했다. 선생이 감형받아 출옥했을 때, 친구들이 위로연을 베풀고 기생을 불렀다. 그 사실을 안 여사는 아들을 집에 데려와,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라며 야단쳤다. 이에 선생은 잘못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한번은 임시정부 식구들이 곽 여사의 생일잔치를 몰래 준비하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 챈 여사는 잔치 대신 돈을 주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먹겠다 하고는, 받은 돈에 자신의 돈을 더 보태어 독립운동에 쓰라며 내놓았다. 또 어떤 날은 동지들이 여사의 위신을 생각해 비단옷을 해주었더니, “지금 우리가 밥술이라도 넘길 수 있는 건 윤(윤봉길) 의사의 핏값 때문이야”라며 당장 물리라고 호통을 쳤다.
곽 여사는 경우에 어긋난다고 생각될 땐 호랑이처럼 엄해도, 가난한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하며 늘 동지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대를 골라서 씻고 죽을 끓여, 굶주리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부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곽 여사는 임시정부 내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 독립운동에 힘쓰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간디에게는 관용으로 잘못을 일깨워준 아버지가 있었고, 고흐에게는 끝까지 믿고 지지해준 동생이 있었다. 김구 선생에게는 투철한 애국심과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길로 이끌어준 어머니가 있었다. 이처럼 큰사람 뒤에는 그를 믿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름을 널리 알려야만 큰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삶의 가치를 깨닫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사람, 주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 작고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면 어느 면에서는 큰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
그런데 이들 위인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까닭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존경하는 스승 혹은 가까운 친구인 경우도 있지만, 이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해준 사람은 대부분 가족이다. ‘가정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 ‘한 명의 아버지가 백 명의 선생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됨됨이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즉 큰사람은 가정에서 가족의 지지와 응원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의 무한한 신뢰와 격려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샘솟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관용을 가르친 아버지
오랜 벗 타고르가 지어준 별칭,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로 불리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평화운동가 간디는 인도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가 내세운 비폭력주의는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등 후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인도 서부 구라자트주의 포르반다르에서 상인 계급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유대 관계가 좋았던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성심성의껏 간병했다. 그런 그에게도 여느 사춘기 소년처럼 일탈의 시기가 있었다.
간디가 열다섯 살 때였다. 호기심에 부모 몰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그는 점점 담배에 중독되었다. 그의 집은 비교적 유복했지만 어린 그는 담배 살 돈이 충분하지 못했다. 돈이 떨어지자 담배를 사기 위해 형의 금팔찌에서 조각 하나를 떼어 내는 도둑질까지 감행했다.
순간의 유혹을 못 이겨 도둑질을 했지만,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편지에 하나하나 써내려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 편지를 병상에 있는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벌을 받고 나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크게 노할 거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편지를 다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아버지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용서의 의미였다.
그날 아버지가 흘린 눈물은 간디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간디는 다시는 남을 속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나의 아버지는 숭고한 관용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구원해주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일은 간디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그를 위대한 지도자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형을 끝까지 믿고 지지한 동생
천재 화가, 인상파의 거장, 불꽃처럼 인생을 살다 간 위대한 화가, 강렬한 색채의 마술사,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고흐를 말하면서 동생 테오(Theo van Gogh)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성직자 집안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흐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예민하고 불같은 성격 탓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는 장남에게 거는 기대가 커 좋은 교육을 받게 했지만, 고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만은 예외였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와 사이가 각별했던 테오는, 고흐에게 단순히 동생이 아닌 친구이자 동료요 헌신적인 후원자였다.
화려한 수식어와는 반대로, 생전에 고흐는 화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였다. 그는 화랑 직원, 교회 보조 교사, 책방 점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쳐 27세의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7세에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약 10년 동안 유화 900여 점, 드로잉 1,100여 점을 남겼다. 고흐가 짧은 기간에 온 열정을 불태워 주옥같은 그림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테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흐의 예술 감각을 알아본 테오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형이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편지로 소통하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고흐는 테오에게만큼은 자신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좌절과 회의감에 힘들 때면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테오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둘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무려 700통이 넘는다.
“내 작업이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절반은 네 공이다. 너는 그만한 권리가 있다.”
-1885년 4월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中
“분명 형은 살아 있을 때 성공을 거두게 될 거야.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형의 아름다운 그림들 때문에 저절로 이름이 알려지게 될 거라고.”
-1890년 1월 테오가 고흐에게 보낸 편지 中
고흐가 세상의 외면과 가난, 정신질환 등 어려움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테오.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는 유명한 화가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만든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아들은 비밀결사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게 끌려가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아들을 면회 온 어머니는,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일화다.
김구(1876~1949) 선생은 의병 활동과 계몽운동을 벌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일제의 감시와 열악한 환경, 자금난 등으로 임시정부의 운영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에게, 대한민국은 그가 서거한 지 13주년이 되는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김구 선생이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남기까지, 그의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강하고 씩씩한 어머니이자, 애국정신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였다. 곽 여사는 객줏집 식모살이와 삯바느질을 하며 김구 선생의 옥바라지를 했고,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빈 젖을 물려가며 어린 손자들을 키웠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곽 여사의 강직한 기개는 때로 김구 선생을 부끄럽게 했다. 선생이 감형받아 출옥했을 때, 친구들이 위로연을 베풀고 기생을 불렀다. 그 사실을 안 여사는 아들을 집에 데려와,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라며 야단쳤다. 이에 선생은 잘못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한번은 임시정부 식구들이 곽 여사의 생일잔치를 몰래 준비하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 챈 여사는 잔치 대신 돈을 주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먹겠다 하고는, 받은 돈에 자신의 돈을 더 보태어 독립운동에 쓰라며 내놓았다. 또 어떤 날은 동지들이 여사의 위신을 생각해 비단옷을 해주었더니, “지금 우리가 밥술이라도 넘길 수 있는 건 윤(윤봉길) 의사의 핏값 때문이야”라며 당장 물리라고 호통을 쳤다.
곽 여사는 경우에 어긋난다고 생각될 땐 호랑이처럼 엄해도, 가난한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하며 늘 동지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대를 골라서 씻고 죽을 끓여, 굶주리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부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곽 여사는 임시정부 내 존경받는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 독립운동에 힘쓰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간디에게는 관용으로 잘못을 일깨워준 아버지가 있었고, 고흐에게는 끝까지 믿고 지지해준 동생이 있었다. 김구 선생에게는 투철한 애국심과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길로 이끌어준 어머니가 있었다. 이처럼 큰사람 뒤에는 그를 믿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름을 널리 알려야만 큰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삶의 가치를 깨닫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사람, 주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 작고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면 어느 면에서는 큰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가족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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