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돌의 긴 이야기


#1

낮게 떨어진 해가 바다에 스며들 무렵이면 파도는 유난히 부드럽습니다.

수평선에 살포시 드리운 햇살이 파도의 품에서 밀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했습니다.

파도에 몸을 적신 몽돌은 매끈한 표면으로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몽돌은 파도가 다가올 때면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습니다.

파도의 힘에 몸이 들썩일 때마다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겉보기에는 그저 작은 돌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주 긴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2

그는 한때 강가의 높은 절벽 위에 깊이 박힌 거대한 바위였습니다.

바윗돌은 오랜 세월 하늘을 찌를 듯 꼿꼿이 서있었습니다.

구름은 바위의 허리에서 부서졌고,

바람은 바윗돌과의 대결에서 번번이 패했습니다.

바윗돌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동이 틀 무렵이었습니다.

태양이 검푸른 하늘을 가르며 찬란하게 세상을 비출 때면

바윗돌은 어깨를 더욱 곧추세웠습니다.

‘나보다 높은 건 하늘뿐이지. 모든 것이 내 발아래에 있어.’

바윗돌은 의기양양했습니다.



#3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몸 어딘가 미세한 틈으로 파고든 빗물이

낮에는 고여 있다가 밤이 되면 단단히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미세했지만,

얼어붙은 물은 바위의 틈을 서서히 벌려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는 동안 물이 얼었다가 녹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틈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습니다.


#4

별안간 폭풍이 휘몰아치던 날이었습니다.

천둥이 온 산을 집어삼킬 듯 우르릉댔고, 벼락이 하늘을 찢었습니다.

북편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절벽을 뒤흔들었습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굳은 신념은 ‘쩍!’ 소리와 함께 산산이 갈라졌습니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는 그 순간,

바윗돌은 영원히 있을 줄로만 알았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낭떠러지 아래로 처참하게 낙하한 그를, 강물은 지체 없이 삼켜버렸습니다.

찬 기운이 바윗돌의 몸을 휘감았고, 물살은 그를 매몰차게 떠밀었습니다.

바윗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물에 휩쓸려 갔습니다.



#5

물살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바윗돌을 밀어붙였습니다.

눈앞으로 흙탕물과 이름 모를 물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자신보다 큰 바위에 사정없이 들이받혔고, 작은 돌조각들에 수없이 긁혔습니다.

바윗돌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거대한 물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변하는 것은 패배다.’

그의 믿음은 강물 속에서 부딪히고 또 부딪히면서 산산이 깨어져 갔습니다.

강물은 바윗돌이 나약한 일, 패배라 여겼던 ‘변화’를 몸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모서리를 하나하나 잃었습니다.

예전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아져만 갔습니다.



#6

그는 질문했습니다.

‘왜 나를 끝없이 깎아내는 거지?

이렇게 작아지면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는 거지?’

그의 물음은 물살에 실려 흘러가고

강물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며 그를 앞으로 밀어 보냈습니다.

질문의 답은 세월이 더 흐르고 나서야 얻게 되었습니다.

깨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뜻했고,

변화는 그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고집하던 것들을 잃으며 그는 가벼워졌고,

깎여나간 표면에는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7

오랜 시간 물살에 떠밀리던 돌은 어느덧 작은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잔잔한 물살은 그를 어루만져 주었고, 고운 모래는 그를 따뜻하게 받쳐주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구나.’

그는 그 사실에 두려움보다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바다를 물들이는 석양 속에서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지난날을 떠올렸습니다.

무너지는 것만 같던 순간들, 끝없이 떠밀리던 시간들, 이해되지 않던 상실의 의미를

그는 처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8

“엄마, 이 돌 좀 보세요. 정말 매끄럽고 예뻐요!”

아이가 돌을 주워 엄마 앞에 내밀었습니다.

돌은 아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기분이 묘했습니다.

절벽 위의 바위였다면 결코 느껴보지 못할 기분이었습니다.

돌을 받아 든 아이의 엄마가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이 돌은 먼 곳에서 왔단다.

부서진 만큼 단단해지고, 깎인 만큼 부드러워졌지.

그렇게 떠밀린 끝에 여기까지 왔어.

이런 돌을 몽돌이라 부른단다.”

‘몽돌….’

돌은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불러보았습니다.

동글동글하고 보드레한 소리가 지금 자신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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