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수박농장 김 노인
“맴맴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매미 소리가 온 마을을 쩌렁쩌렁 울립니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목에 수건을 걸친 김 노인은 수박을 따러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비닐하우스 안의 열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였습니다.
초록빛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수박들이 넝쿨 사이 군데군데 박혀 있습니다. 속에서 당분이 배어 나와 겉이 뽀얀 수박들을 보며 김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수박을 통통 두드려 신선도를 확인하는 김 노인의 손길이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습니다. 이른 봄부터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왔기에 김 노인의 눈에는 수박 한 덩이 한 덩이가 귀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줄기를 자를 때는 마치 탯줄을 자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지요.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한 탓에 무릎에 통증이 느껴진 김 노인은 일어서서 한쪽 다리를 허공으로 쭉 뻗었습니다.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눈을 찔렀습니다. 김 노인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뒤 몸을 구푸려 커다란 수박을 가슴으로 안았습니다. 그러고는 볏짚을 깔아놓은 손수레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이놈 참, 묵직하기도 하지. 안 봐도 속이 꽉 찼을 게야. 이제 세상 구경 나가서 사람들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려무나.”

#2 텅 빈 교실의 효주
효주는 빈 교실에 홀로 앉아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집은 어린 동생들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어, 효주는 방학 기간이지만 가방을 메고 학교를 찾았습니다. 벽에 달린 선풍기가 덜덜거리며 더위를 쫓아냈습니다. 목이 뻐근해진 효주는 기지개를 켜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내리쬐는 햇볕에 운동장의 모래알이 반짝였습니다.
효주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당장이라도 친구들이 놀고 있는 개울로 달려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효주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병실에서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강아지는 뭐가 되고 싶으냐?”
“나는 할머니 아픈 데 전부 고쳐주는 사람이 될 거야.”
“아이고, 우리 손녀가 의사 선생님이 될랑가 보네. 말만 들어도 이 할미 병이 싹 나은 것 같으다.”
주름진 손으로 어깨를 쓰다듬어주던 할머니가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할머니와의 약속은 효주의 꿈이 되었습니다. 의대 진학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운 뒤부터, 효주는 공부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느껴졌습니다.
효주는 다시 연필을 쥐었습니다. 서걱거리는 연필 소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3 축사에서 일하는 수만
수만은 커다란 사료 포대를 어깨에 둘러멨습니다. 사료 포대의 묵직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수만이 다가가자 누렁소들이 반갑다는 듯 고개를 내밀며 콧김을 뿜었습니다. 그런 소들을 어루만지는 수만의 손길이 다정스럽습니다. 수만은 구유에 사료를 가득 부어 소들이 먹기 쉽도록 골고루 펼쳐준 뒤, 축사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아이고, 더워라. 더워.”
낡은 간이의자에 몸을 기댄 수만의 입에서 낮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수만은 고향 말보다 한국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자신이 생경하면서도 대견했습니다. 수만은 장갑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풍성한 뭉게구름이 천천히 떠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런 구름… 네팔에도 있어.’
하늘에는 국경이 없어 구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고향 집 마당까지 갈 것만 같았습니다. 흐르는 구름에 그리움을 실어 네팔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수만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내와 눈이 초롱초롱한 아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방울만큼 네팔에 있는 가족이 더 좋은 집에 살고, 아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힘이 났습니다. 벗어놓은 장갑을 다시 끼며 수만은 스스로에게 속삭였습니다.
‘수만,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4 두 아이의 엄마, 미영
책과 장난감이 널브러진 거실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 듯했습니다. 식탁에서는 세 살배기 첫째가 서툰 숟가락질로 밥을 먹느라 밥알과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백일이 지난 둘째는 땀범벅이 된 채 미영의 등에 업혀 칭얼거리고 있습니다. 미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리며 둘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두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나서야 집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시곗바늘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미영은 아직 아침조차 먹지 못했습니다. 밥 한술로 대충 끼니를 때운 미영은, 아이들이 깰세라 조용히 거실을 정리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얼룩진 옷가지를 손으로 비벼빨아 볕 좋은 마당에 널었습니다.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조그만 티셔츠와 손수건을 보며 미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도시의 빽빽한 아파트 숲 대신, 흙을 밟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자연의 숲에서 아이들을 키우려고 선택한 시골이었습니다. 교사인 남편이 이곳의 작은 학교로 전근을 지원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미영과 남편은 연고 없는 곳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용기가 필요했지만,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으앙-”
장독대 옆에 핀 채송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미영은 둘째의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온몸 마디마디가 욱신거리고 티셔츠가 끈적이며 등에 달라붙었습니다. 스스로 칭하기에 어색했던 이름이 이제는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응, 엄마 여기 있어!”

#5 마을의 해결사, 이장 박 씨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날이 몹시 뜨거우니 어르신들은 한낮에 밭일 나가지 마시고….”
마을회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박 씨의 목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집니다. 안내 방송을 마친 박 씨는 보수 공사 중인 마을 안길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몇 시간째 공사 현장을 지키고 있던 탓에 그의 셔츠 목덜미에는 하얀 소금기가 피었습니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며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은 박 씨는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한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던 그는, 스스로 실패자라는 낙인을 붙인 채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임 이장 어른이 찾아와 대뜸 이장 자리를 권했습니다.
“도시에서 똑똑하게 살던 자네가 마을 살림을 봐줘야지, 언제까지 방구석에만 있을 겐가!”
박 씨는 손사래를 치매 거절했지만 결국 등 떠밀려 이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을 어르신들의 손발이 되어 행정 서류를 쓰고, 군청을 드나들며 보조금을 받아내고,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등 마을의 대소사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르신들이 건네는 진심 어린 칭찬과 감사의 마음은 박 씨를 서서히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여전히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마을 안길 공사가 마무리되자, 박 씨는 다음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 위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6 웃음으로 이겨내는 여름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김 노인이 갓 수확한 수박 세 통을 수레에 실어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평상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러고는 이장 박 씨를 시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수박의 크기가 워낙 커서 보는 사람마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우아, 수박이 보름달처럼 커요.”
효주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자, 아이를 안은 미영이 맞장구쳤습니다.
“그러게. 초록빛 보름달 같네.”
수만이 두 손으로 수박을 들어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 노인이 흐뭇한 얼굴로 수박 앞에 섰습니다.
“자, 보름달 수박이 잘 익었나 어디 한번 볼까.”
껍질에 칼날이 닿기 무섭게 수박이 쩍 소리를 내며 두 동강으로 갈라졌습니다. 붉은 과육이 환하게 드러나면서 달콤한 향기가 훅 퍼져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원한 과즙이 흐르는 수박을 한 조각씩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박 씨는 “이 맛에 여름 나는 거죠” 하며 수박을 한입 베어 물었고, 효주는 “맛있다”를 연발했습니다. 미영의 첫째 아이는 양손으로 수박을 붙잡고는 입가를 빨갛게 물들였고, 수만은 한 조각을 해치우고 두 개째 집어 들었습니다. 매미 소리는 여전히 온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보름달 수박처럼 말갛고 시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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