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설레는 목소리에 태오도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눈코 뜰 새 없었던 태오는, 이번 휴가 때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부모님 역시 바쁘게 살아온 터라 여행 한번 가본 적 없기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한 것입니다.
태오는 한 달 전부터 틈틈이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고르고, 식당을 알아보고, 일정을 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부모님과 가는 첫 해외여행인 만큼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통화를 마친 태오는 다시 한번 일정과 예약을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두 분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긴장되었습니다. 태오는 잠자리에 누워 한참을 뒤척인 끝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2
시간을 확인한 태오가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전날 잠을 설친 탓에 알람을 못 들은 태오는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습니다. 대충 씻고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은 뒤 모자를 눌러썼습니다. 그러고는 얼른 차에 짐을 싣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저 방금 출발했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뭐든 미리 준비해야 직성이 풀리는 태오는 한 시간을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을 폈다가 오므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두 분은 이미 문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태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부모님의 여행 가방을 얼른 차로 옮겼습니다.
차가 도심을 가로질러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였습니다.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태오가 룸미러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손가방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태오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왜요, 아버지?”
“여권이 어디 갔지…?”
태오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엄마가 아버지의 손가방을 낚아채 그 안에 든 물건들을 모조리 꺼냈습니다. 앞주머니를 열고, 안주머니도 확인하고, 바닥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권은 없었습니다.
“제가 여권 꼭 챙기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태오는 시계를 흘낏 보고는 차를 급히 돌렸습니다.
#3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자, 기내에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도착했다!’
태오는 짧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집에서부터 출국까지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알람을 못 듣고 늦잠 잤던 일, 아버지가 여권을 빠뜨려 부랴부랴 집에 되돌아갔던 일, 탑승 시간에 임박해 간신히 출국 수속을 밟았던 일, 서두른 게 무색하게도 비행기가 세 시간이나 연착했던 일…. 가슴 졸였던 시간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임자, 우리가 아들 덕분에 외국 땅을 다 밟아보는구려.”
“누구 아들인지 참 잘 키웠네요? 호호!”
즐거워하시는 부모님과 입국 심사를 마친 후, 느긋한 마음으로 수하물을 찾았습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차량 예약 업체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태오의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예약 시간으로부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차량 인수가 불가능하며, 별도의 연락을 취하지 않을 경우 예약이 취소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태오는 여행지에서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려고 렌트카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업체에 전화를 걸어 규정을 몰랐다고 호소했지만, 안내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태오에게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차량을 알아보느라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부모님은 괜찮다며 태오를 안심시켰습니다. 태오의 굳은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습니다.
#4
태오와 부모님은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체크인하려고 안내 데스크에 갔을 때, 태오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죠? 예약하신 객실은 현재 입실이 어렵습니다….”
“네? 제가 한 달 전에 예약했는데요?”
태오는 예약한 내역을 내밀었습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약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오의 눈썹이 꿈틀했습니다. 직원은 사과하며 다른 객실을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새로운 객실이 배정되었지만, 태오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기존에 예약했던 객실처럼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호텔 직원은 이틀 뒤에 바다가 보이는 객실로 바꿔주겠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태오는 언성을 높이며 항의했습니다.
이후로도 예상치 못한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야시장에서 좀도둑에게 가방을 도난당할 뻔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꼼짝없이 호텔 안에 있기도 했습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선상에서의 식사가 무산되기도 했지요. 철저하게 세웠던 계획들이 완전히 어긋나자, 아들만 믿으라며 큰소리쳤던 태오는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5
책상 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좌우로 젖히며 뻣뻣한 목을 풀었습니다. 휴가를 보내고 왔지만 평소보다 더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컵을 들고 탕비실로 가 커피를 타고 있는 태오에게, 친한 동료가 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여행은 어땠어?”
“말도 마. 엉망이었어.”
태오는 툴툴거리며 여행길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습니다. 여행담은 거의 하소연에 가까웠습니다. 얘기를 다 들은 동료는 태오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고 자리로 갔습니다. 그때,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렸습니다.
「태오야, 네 보조배터리가 엄마 가방에 있었네. 시간 될 때 가지러 와.」
태오는 퇴근 후에 부모님 집으로 갔습니다. 현관문을 여니 엄마가 이웃에 사는 어른들과 얘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살그머니 신발을 벗는 동안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우리 아들이 고급 호텔을 딱 잡아놨더라고. 로비부터 어찌나 으리으리하고 멋있던지 궁전 같더라니까. 하루는 태풍이 와서 종일 호텔 방에 있었는데, 아들하고 오랫동안 얼굴 보면서 얘기한 게 몇 년 만인지 몰라. 나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했어.”
아버지도 질세라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이며 거들었습니다.
“나는 야시장에서 군것질하는 재미가 쏠쏠하더라고. 아들 어릴 적에 손잡고 오일장 갔던 기억도 나고. 허허.”
부모님의 극찬에 쑥스러워진 태오는 현관 앞에 서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6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태오의 귓가에는 이웃에게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내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았습니다. 여행이 엉망이었다며 투덜거렸던 자신과 달리, 부모님의 기억에는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태오는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고 화내며 항의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여행을 계획하며 바랐던 것은 부모님의 기쁨보다는, 완벽한 일정으로 인한 자신만의 만족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정작 부모님은 불편함이나 서운함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속상해하는 아들의 모습에 눈치를 보며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려 애썼는데 말이지요.
‘여행을 엉망으로 만든 건 바로 나였구나.’
태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자취방에 온 태오는 컴퓨터를 켰습니다. 객실 문제로 요구한 손해 배상에 대해 호텔 측에서 보상안을 제시하는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태오는 답신 버튼을 클릭해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보상은 사양하겠습니다. 부모님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행복해하셨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