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크레파스

‘크레파스를 어떻게 준비하지?’

루빈은 다음 시간에 크레파스를 갖고 오라는 미술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부모님과 형까지 네 식구가 사는 루빈네는 아빠가 작은 목공소에서 벌어오는 월급으로 생활하기에 살림이 늘 빠듯합니다. 루빈은 최근에 부모님이 할아버지 보청기를 해드려야 하는데 돈이 조금 부족하다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화 나누는 소리를 들었고, 형의 키가 부쩍 커서 교복을 새로 맞춰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 많은 부모님께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하려니 쉬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 부잣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루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 양쪽에 지어진 집들이 오늘따라 더 근사해 보입니다. 형에게 물려받은 낡은 운동화를 신은 자신이 더욱 초라해 보였지요. 그때, 어느 집에서 대문 여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유, 아까워라. 멀쩡한 걸 다 버리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줘도 될 텐데. 그래도 주인이 버리라고 하니 어쩔 수 없지 뭐.”

하얀 앞치마를 두른 가정부 아주머니가 혼잣말하며 커다란 상자를 대문 앞에 놓고 들어갔습니다. 루빈은 상자에 시선이 갔습니다. 장난감과 옷가지, 그리고….

‘크레파스다!’

루빈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길 바라며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분명 크레파스 케이스였습니다. ‘멀쩡한 걸 다 버리네’ 했던 아주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루빈은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뒤에서 여자아이 두 명이 조잘대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루빈은 가던 길을 멈추고 책가방을 벗어 바닥에 놓고는 안에서 뭔가 찾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러다 여자아이들이 지나가자, 슬그머니 상자 쪽으로 다가가 크레파스 케이스를 꺼냈습니다. 심장이 콩콩댔습니다. 남의 집에서 내놓은 상자를 뒤지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서인지, 케이스 안이 비어 있거나 닳아빠진 크레파스만 남아 있을까 봐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루빈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케이스를 열었습니다.

“와!”

루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크레파스는 끝만 살짝 뭉뚝할 뿐 거의 새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루빈은 크레파스를 품에 꼭 안고 잠이 들었습니다.


미술 시간.
루빈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놀이공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앞자리에 앉은 조안나로부터 생일에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내심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루빈은 언젠가 책에서 본 놀이공원을 떠올리며 스케치북을 빽빽하게 채웠습니다. 색색 칸의 관람차와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괘종시계의 추처럼 씽씽 왔다 갔다 하는 바이킹, 토끼 귀 모양의 머리띠를 한 아이와 풍선을 들고 있는 아이, 몽실몽실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까지. 루빈은 완성된 그림을 보며 흡족한 듯 미소 지었습니다.

‘아, 이 그림이 실제로 내 앞에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정말 행복할 텐데!’

루빈은 오늘 밤 꿈에서라도 놀이공원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루빈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밝은 햇살에 찡그렸던 눈을 살며시 뜨자, 백설공주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루빈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관람차와 회전목마, 바이킹…. 루빈은 놀이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백설공주 분장을 한 사람은 놀이 기구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표를 루빈의 손목에 채워주고는 손을 흔들며 지나갔습니다.

‘이럴 수가! 놀이공원을 그렸더니 정말 왔잖아.’

루빈은 설레는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놀이 기구를 탔습니다. 위아래로 움직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목마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신난 루빈은 깡통 기차, 정글 놀이터, 급류타기, 범퍼카도 탔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놀았더니, 놀이 기구 타는 것이 슬슬 재미없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볼까? 음… 그래!’

루빈은 벤치에 앉아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꺼내 다음으로 가고 싶은 곳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다 완성하자, 피곤했던지 눈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후, 우렁찬 코끼리 울음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멋진 위용을 뽐내는 사자, 까만 눈이 빛나는 반달가슴곰, 긴 코로 물을 내뿜는 코끼리, 나무보다도 키가 큰 기린… 여러 동물을 구경할 수 있는 동물원이었습니다. 루빈은 처음 보는 동물들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드넓은 동물원에 있는 동물을 구경하러 많이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습니다.

‘이번에는 눈썰매장을 가볼까?’

루빈은 벤치에 앉아 눈썰매장을 그렸습니다. 잠시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자 어김없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눈썰매장에 와 있었습니다. 눈썰매를 실컷 탄 루빈은, 다음에는 장난감 박물관에 가서 장난감을 마음껏 구경했고, 그다음에는 수영장에 가서 물놀이도 했습니다.

그렇게 루빈은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을 한 번씩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어졌습니다. 아빠 엄마, 형이 그립고 보고 싶었습니다. 집 생각을 뒤로한 채 어디에 갈 것인지만 궁리했던 처음과 달리, 창밖에 노을이 질 때면 네 가족이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던 그 시간이 간절해졌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지.’

루빈은 자신의 방을 그리기 위해 가방에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꺼냈습니다. 크레파스는 거의 닳아 몽땅해져 있었습니다. 침대와 책상, 서랍장 하나가 전부인 작은 공간이지만, 방을 떠올리는 순간 루빈은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먼저 고동색 크레파스로 창문을 그렸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여닫이창이었습니다. 창문을 그리다 보니, 몇 주 전 형과 마당에서 야구를 하다 창문을 와장창 깨뜨린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형이 부모님께 자신의 실수라며 대신 용서를 빌었지요. 평소 양보도 잘하고 감싸주기도 잘하는 형인데, 그때는 더욱 고마웠습니다. 테이블을 지나다 엄마가 아끼던 찻잔을 깨뜨린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또 사고를 치면 안 될 터였거든요. 루빈은 집에 가면 책상 서랍에 아껴두었던 초콜릿바를 형에게 주며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문을 그린 뒤에는 책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루빈이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 아빠가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들어 준, 세상에서 하나뿐인 책상이었습니다. 루빈은 아빠가 책상을 선물하며 “공부만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책을 통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라” 하셨던 게 떠올랐습니다. 그때 루빈은 마음속으로 ‘아빠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었습니다. 아빠야말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 그 자체였으니까요.

이번에는 침대를 그릴 참이었습니다. 이불을 덮으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 누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엄마 품 같은 침대. 그리고 엄마. 언젠가 자신이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 침대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엄마의 모습이 루빈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몸은 아픈데도 엄마의 사랑을 한껏 받으니 기분이 좋아서 내심 ‘가끔 이렇게 아픈 것도 좋겠다’라고 생각했더랬지요.

그렇게 지난날을 추억하며 방을 그려나가던 루빈은, 비록 집은 가난해도 자신이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를 준비해갈 걱정에 잠시나마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후회했지요. 자상한 아빠, 다정한 엄마, 친절한 형이 있기에 아무도 부럽지 않으니까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며 가장 소중한 곳이 어디인지, 마음 깊이 알게 되는 순간 루빈의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루빈은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서둘러 색을 칠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벽지만 남았습니다. 루빈이 가장 좋아하는 하늘색이었습니다.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아빠 엄마, 형이랑 같이 벽지를 바르며 자기 방이 생겼다고 즐거워했었지요. 하늘색 크레파스는 즐겨 사용한 탓에 유독 짧아져 있었습니다.

‘하늘색 크레파스야, 제발 조금씩 닳으렴. 벽지를 다 칠할 때까지만….’

루빈이 엄지와 검지로 겨우 쥘 만큼 몽땅한 하늘색 크레파스를 아껴서 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 스케치북이 저만치 날아가버렸습니다. 루빈은 깜짝 놀라 스케치북이 떨어진 곳으로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손이 스케치북에 닿으려 할 때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스케치북을 날려버렸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스케치북은 자꾸만 멀어졌습니다. 이러다 집에 영영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안 돼. 나 집에 가야 한다고!”

루빈은 엉엉 울며 달려가다 넘어져 무릎이 깨졌습니다. 아파할 겨를도 없이, 짓궂은 바람의 장난에 겨우 스케치북을 붙잡은 루빈은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도록 품에 꼭 안았습니다. 그렇게 스케치북을 껴안고 울다 지쳐서 잠에 빠졌습니다.

얼마 후, 루빈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살짝 열린 창문, 정든 책상과 침대. 집이었습니다.

‘휴, 살았다.’

루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방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학교 갔다 집에 와서는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입니다. 루빈을 부르던 형은 기척이 없자 방문을 빼꼼 열고 말했습니다.

“루빈, 낮잠을 왜 그리 오래 자?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어? 으응. 괜찮아.”
“얼른 나와. 아빠도 벌써 오셨어. 엄마가 양파 피클 만드시는데, 너도 와서 도와.”
“응, 알았어.”

루빈은 눈물로 얼룩진 스케치북을 덮고 방을 나섰습니다. 주방에서 아빠랑 형은 양파를 까고, 엄마는 깐 양파를 썰고 있었습니다. 다들 양파의 매운 향에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도 즐거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루빈의 입가에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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