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싱그러운 꽃향기가 가득한 꽃집. 한 청년이 마주 앉은 여성에게 팸플릿을 보여주며 커피머신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커피머신은 추출방식과 원리에 따라 수동식, 반자동식, 자동식, 전자동식 등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고객님들께 수동식, 반자동식, 자동식 등 세 가지를 보여드리거든요. 고객님이 머신을 어디에 사용할 건지 알면 더 쉽게 추천해 드릴 수 있어요.”
“음, 저는….”
여성은 ‘집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커피머신을 알아보려 한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청년은 상대의 말을 끊고 내려간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금 말을 이었습니다.
“일단 하나씩 장단점 설명해 드릴게요. 수동식은 요즘 잘 안 쓰는 거니까 패스하고, 반자동 기계는 기계적인 메커니즘이 단순해서 잔고장이 잘 안 나고 관리하기가 쉬워서 좋아요. 다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나 장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초보자분들은 다루기가 조금 힘들 거예요. 반면 전자동 기계는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커피를 내릴 수 있고 크기가 작아 좁은 공간에 설치하기 쉬운 장점이 있는데, 수동식과 달리 잔고장이 많고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단점이 있어요. 사장님은 당연히 꽃집과 카페를 병행할 목적으로 알아보시는 거겠죠?”
“그게 아니고….”
“고객님이 사용하실 공간에 맞춰서 가장 알맞은 제품으로 보여드릴게요.”
패기 넘치는 이 청년은 커피머신 판매회사 영업 3팀의 유망주, 송지호 사원입니다. 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리더십도 있는 데다 뛰어난 언변을 자랑해, 지호 씨가 입사했을 당시 그를 향한 팀원들의 기대와 관심은 높았습니다. 지호 씨가 모든 제품의 사양과 정보를 달달 외우는 열정까지 보여주었을 때는 그를 보는 눈빛들이 더욱 반짝반짝해졌지요. 하지만 지금은 유망주에서 ‘만년 유망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입사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팀의 기대에 부응하긴커녕 저조한 실적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오늘도 지호 씨는 고객에게 목이 쉴 정도로 제품의 장점을 설명했지만,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빈손으로 사무실에 복귀했습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이어진 김 과장의 호출과 꾸중은 그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습니다.
#2
웅웅-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자취하는 집으로 가는 길, 지호 씨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둔 동생, 지혜였습니다.
“오빠, 퇴근했어?”
“응, 집에 가는 길이야. 무슨 일 있어?”
“그냥….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심란하네. 시험 때가 가까울수록 집중이 안 돼.”
동생의 말에 지호 씨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본인도 때로는 공부가 안된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꾀를 부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해보니 그게 다 배부른 소리였더군요. 아무리 힘들어도 학생일 때가 제일 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동생의 하소연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말로 느껴졌습니다. 사회생활 선배로서, 동생이 나중에 학창 시절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도록 한마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혜야,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게 공부야. 게다가 엄마가 밥해 주시지, 아빠가 용돈 주시지. 다른 걱정 없이 넌 공부만 하면 되는데 왜 집중을 못하고 그래.”
“나도 그런 것쯤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왼손으로 고쳐 잡느라 동생의 말을 듣지 못한 지호 씨는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번에도 오빠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려준 적 있잖아. 미국의 심리학자 마슬로우가 정리한 욕구 단계 이론을 보면 가장 상위 단계에 있는 게 자아실현의 욕구야. 네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걸 이루게 해주는 수단이 뭐라고 했지? 대부분 지식이나 기술 같이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집중해서 공부해야 해.”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그리고 네가 아직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렇지. 살아보면 공부만큼 쉬운 일도 없다니까. 지금 네 나이 때가 가장 행복한 거야.”
“오빠한테 전화한 내가 잘못이지. 끊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빠의 말을 듣다 못한 동생은 결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지호 씨는 동생에게 힘을 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상한 것
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3
다음 날, 계약 성사를 다짐하며 일찍부터 외근을 나선 지호 씨는 발에 땀이 차도록 거래처 곳곳을 돌아다니다, 근처에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작년에 카페를 개업한 준우 선배는 지호 씨의 첫 실적을 올려준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선배 얼굴도 보고 목도 축일 겸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세요.”
어찌 된 일인지 선배가 아닌 낯선 사람이 그를 맞았습니다. 지호 씨는 카운터로 다가가 물었습니다.

“사장님이 안 보이네요. 어디 가셨나요?”
“네, 잠시 외출하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외출한 선배를 대신해 카페를 지키고 있었던 이는 선배의 친한 친구라고 했습니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며 일도 배울 겸 잠깐씩 도와준다는 말에 지호 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무려 카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을 만나다니, 실적을 올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지호 씨는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선배의 친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창업하실 거니까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저는 커피머신 판매회사 영업 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오, 정말요? 반갑네요. 제가 예전에 커피머신 수리하는 엔지니어로 일한 적 있거든요. 근데 커피와 관련된 직종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바리스타냐고 물어보지 않아요?”
“맞아요, 저도 그런 경험….”
“다들 바리스타만 알지, 다른 직종은 잘 모르더라고요. 커피 한 잔이 나오려면 생산자부터 커피 감별사, 연구원, 컨설턴트 등 바리스타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걸 몰라줘서 저는 좀 아쉬웠어요.”
“그렇죠. 저도 사실….”
“그런데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바로 준우였어요. 알고 지낸 지는 한 5년쯤 됐나? 준우랑은 취업 준비 카페에서 우연히 접한 면접 스터디에서 처음 봤거든요.”
지호 씨는 선배 친구가 자꾸 말을 끊는 게 거슬렸습니다. 하지만 커피머신을 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습니다. 선배 친구는 완성된 커피를 건네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기계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다는 둥 관련 업체 사장들과도 안면이 있다는 둥 본인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히 설명했습니다.
‘후, 끼어들 틈이 없네. 오늘도 실적 올리기는 글렀군.’
지호 씨는 팸플릿을 펼칠 타이밍을 여러 차례 노렸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자 대충 맞장구나 쳐주고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호응하고, 질문도 던지면서 선배 친구의 인생 스토리를 들었지요. 물건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하니 마음도 편했습니다. 그런데 신나게 말을 하던 선배 친구가 잊은 것이 생각난 듯 이마를 탁 쳤습니다.
“아차, 커피머신 얘기하다 엉뚱한 데로 샜네. 지호 씨가 보고 괜찮은 제품으로 하나 추천해 줘요.”
“네…?”
선배 친구의 예상치 못한 말에 지호 씨는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가방에서 팸플릿을 꺼내 들었습니다.
“네, 네. 그럼요. 여기 팸플릿 보시겠어요? 사장님은 소형 평수의 카페를 준비하신다고 하셨으니 이 제품이 알맞을 것 같아요.”
“그거 좋네요.”
#4
‘야호! 이게 얼마 만의 실적이야?’
선배 친구와 계약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는 지호 씨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지호 씨는 선배 친구가 물건을 팔아준 이유가 뭘까 곰곰이 분석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한 일은 그저 선배 친구의 말을 들어준 것밖에 없었습니다. 물건에 대한 홍보는 입도 뻥끗 못 했지요.
‘그래, 이거였어!’
지호 씨는 그간 물건을 판매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제품에 대한 유창한 설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방적으로 제품을 설명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다 보니 고객의 말을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고객의 마음을 여는 일이었습니다. 선배 친구에게 물건을 팔게 된 결정적인 요인을 생각해 본 결과,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준 것으로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지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감이 불끈 솟았습니다.
불현듯 전날 동생과의 통화가 생각났습니다.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위로는커녕 본인 말만 한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침 밑반찬을 해놨으니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호출이 있어 지호 씨는 본가로 향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은 지호 씨는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동생을 깜짝 놀래주려고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동생의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지호 씨가 교문 앞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교복을 입어 비슷비슷해 보이는 학생들을 부지런히 살피던 지호 씨의 시선이 동생을 발견하는 순간 멈췄습니다. 동생도 오빠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엄마가 밑반찬 가져가라고 해서 집에 들렀다가 네 마중 나왔지.”
동생은 오빠 손에 들린 치킨을 흘깃 쳐다보았습니다.
“이건 동생을 응원하는 오빠의 선물!”
지호 씨는 동생의 책가방을 받아 자신의 한쪽 어깨에 멨습니다.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대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동생을 보며 지호 씨도 환하게 웃었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는 남매를, 가로등 불빛이 환히 비추었습니다.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