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좀 드시겠어요?”
“아, 아니오. 괜찮소.”
맞은편 자리에 앉은 여자가 빵을 절반 떼어 남자에게 건네자, 남자는 두 손을 흔들며 사양했습니다. 낯선 사람이 건네는 이유 없는 호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거니와, 조금 전 서너 살로 보이는 딸아이의 머리를 묶어주던 손으로 빵을 뜯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더더욱 사양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무안한 듯, 뻗었던 손을 거두었습니다.
남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킷 주머니에서 잘 다려진 손수건을 꺼내 손을 한번 닦은 뒤 무릎 위에 펼쳤습니다. 그러고는 열차에 승차하기 전에 미리 사 두었던 햄버거를 꺼냈습니다. 콜라로 목을 축인 다음 창밖을 바라보며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여자의 딸아이가 신기한 듯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엄마가 주는 빵을 받아먹었습니다.
한 시간 전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남자의 이름은 매튜. 그는 지금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는 중입니다. 벅적거리는 데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작품에 필요한 서정적인 감성을 느끼려 완행열차를 선택했지요. 작가인 그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소설을 구상할 계획입니다. 집필실로 사용하고 있는 그의 집 작은 다락방에서는 도무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년생인 세 아들이 왕성한 혈기를 발산하며 뛰노는 소리, 놀다가 다투는 소리, 다투는 아이들을 훈육하는 아내의 하이톤 목소리…. 집은 마치 아군과 적군이 수시로 뒤바뀌는 정신없는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그는 탈영병이라 낙인찍혀도 좋으니 차라리 그곳을 도망치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천천히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색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매우 만족했습니다. 비록 통로 옆 좌석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수다 맨’이 거슬리긴 했지만요.
매튜가 수다 맨이라 이름 붙인 중년 남자는 매튜가 승차할 때부터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농장주로 짐작되는 그는, 기르던 소 열 마리를 최근 좋은 값에 팔았다는 둥, 송아지가 어미를 잃자 먹이를 잘 안 먹는다는 둥, 얼룩빼기 염소가 자기와 같은 얼룩빼기 새끼에게만 젖을 물리고 무늬 없는 새끼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둥, 들고양이가 자신의 집 마당 후미진 데서 몰래 새끼를 낳았는데 너무 귀여워서 어미와 새끼들을 모두 거두어주었다는 둥, 잡담은 끝이 없었습니다.
수다 맨의 옆자리 그리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그날 그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듯 간간이 호응하며 청중의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남자는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잠을 청하는 척하며, 가끔 몸을 뒤척이는 것으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수다 맨은 말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 뜻을 읽지 못했습니다. 매튜도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눈치를 주었지만, 수다 맨은 매튜와 표정을 마주치자 찡긋 웃기만 할 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햄버거로 점심 식사를 마친 매튜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뭔가 결심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러고는 수다 맨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거, 좀 조용히 해줄 수 없겠소? 여기가 당신 안방이오?”
그러자 수다 맨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 밑천이 다 드러났소. 허허.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구만.”
수다 맨은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눈을 붙이려다 말고 매튜에게 물었습니다.
“그나저나 선생은 어디 가는 길이오?”
매튜는 수다 맨이 또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말했습니다.
“당신이 알 거 없잖소.”
까무룩 잠이 들었던 매튜는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멀리서 승무원이 표 검사를 하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매튜는 기차표가 든 지갑을 찾으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그는 재킷 주머니도 살폈습니다. 재빨리 가방 속을 뒤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듯 한숨을 쉬며 천장을 쳐다보았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산 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고 매점에서 신문을 살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지갑이 사라진 것입니다. 매점에 놓고 왔는지, 걷다가 주머니에서 흘렸는지, 소매치기를 당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맞은편 자리의 여자가 매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이, 승무원은 매튜가 있는 곳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표를 잃어버렸소.”
매튜의 사정을 들은 승무원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도리 없다는 듯, 다음 역에서 내릴 것을 권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푯값이 얼마요? 내가 대신 내겠소.”
수다 맨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의 이유 없는 호의를 달가워하지 않는 매튜였지만, 자존심 세우며 사양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못마땅해했기에 선뜻 감사의 표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다 맨이 승무원에게 돈을 건네는 모습을 그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런 매튜에게 수다 맨이 진담인 듯 농담인 듯 말했습니다.
“빌려주는 거니 꼭 갚으시오.”
“근데 왜 당신이….”
“아, 내가 푯값을 내는 이유요? 말하자면 긴데, 들어보겠소?”
본의 아니게 신세 진 만큼 그의 말을 막을 형편이 못 되는 매튜는,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습니다.
“몇 달 전이었소. 하루는 아침에 개밥을 주러 갔더니 새끼 셰퍼드 일곱 마리 중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거요. 유독 호기심 많은 데다 애교도 많은 녀석이었소. 그런 녀석이 사라졌으니, 가슴이 철렁했다오. 도망갈 구멍이 있는지 울타리 주위를 샅샅이 살폈더니 글쎄, 울타리 한쪽에 땅을 판 흔적이 있는 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울타리 아래에 그 녀석 몸집으로 충분히 빠져나갈 공간이 있더군요. 울타리 주위로 털이 붙어 있는 정황으로 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간 듯했죠. 울타리를 미리 점검해야 했는데! 내 잘못이었소. 혹여 또 다른 녀석도 탈출할지 몰라 우선 울타리부터 손봤다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지. 그러고는 사흘 동안 그 녀석을 찾으러 온 마을을 헤매고 다녔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우리 개를 본 적 없냐고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소. 혹시라도 밤중에 산에서 내려온 늑대나 멧돼지가 물어 갔을까 봐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이었소. 축사에서 소여물을 주고 있는데 아내가 날 급히 부르는 거요. 무슨 일인가 해서 나가 보니, 어떤 남자가 잃어버렸던 우리 셰퍼드를 안고 있는 게 아니겠소! 한달음에 달려가 녀석을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오. 녀석을 찾아준 이는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소. 그 남자가 말하길, 이 녀석이 자기네 집 개와 사이좋게 먹이를 나눠 먹고 있었다는 거요. 그런데 같은 견주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개를 잃어버린 사람이 애타게 찾을 것 같아 일단 매어 놓았다더군요. 주인을 어떻게 찾아줘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옆집 사람이 전날 이웃 마을에 갔는데 누군가 잃어버린 개를 찾고 있는 걸 봤다고 하더래요. 한마디로 나를 본 거였죠. 그래서 묻고 물어 우리 집까지 찾아온 거였소. 너무 고마워서 사례라도 하려고 했더니, 별일 아니라며 극구 사양하는 거요. 아내가 내어온 꿀차 한 잔만 마시고 가버렸지. 녀석을 찾은 기쁨에, 그 사람에게 받은 감동까지 더해져 정말 행복했다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갚은 것 같아 속이 후련하구려.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허허!”
그의 대답은 ‘수다 맨’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잃어버린 개를 다시 찾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할 수 있다니.’
소설이라는 이야기로 밥벌이를 하면서도 평소 말할 때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매튜는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잃어버린 개를 찾은 것과 다른 사람의 푯값을 대신 내주는 일이 그렇게 연결될 수 있음에도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럼 통장 번호를 알려주시오. 집에 도착하는 대로 부쳐주리다.”
“아, 굳이 나한테 갚을 필요 없소. 다른 누군가에게, 다른 방법으로!”
명언 같은 말을 남긴 수다 맨은 다음 역에서 매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내렸습니다. 매튜가 목적지에 도착해 하룻밤 묵을 숙박비와,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매할 만큼의 여비까지 챙겨주고서요. 매튜는 수다 맨이 비록 목소리는 크지만, 이야기를 세세히 풀어내는 솜씨만큼 마음 씀씀이도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다 맨이 내린 이후로도 한참을 더 달린 기차는, 지는 해가 하늘을 발갛게 물들일 즈음에야 매튜를 목적지에 내려다 놓았습니다. 바다가 있고, 언덕이 있고, 등대가 있는 작은 휴양도시였습니다. 역을 빠져나온 그는 스치듯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서 희미한 바다 내음을 맡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방을 잡고 며칠 묵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곳으로 떠나온 목적을 이미 이루었거든요. 수다 맨은 매튜에게 선의만 베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설의 영감까지 주었습니다. 망칠 뻔했던 여행이 뜻밖의 수확을 안겨준 거죠.
등대 앞에서 붉은 바다를 보고 있자니,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가 마음마저 맑게 해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던 매튜는 시장기가 느껴져 근처 식당으로 갔습니다. 가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토르티야 하나를 시킨 뒤 기다리고 있을 때, 군인 세 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빳빳하게 다린 군복을 입었어도 얼굴은 앳되 보이는 신출내기 군인들이었습니다. 외출 나왔다 저녁 먹고 부대로 복귀하려는 것 같았지요.
“아우, 배고파. 피자 맛있겠다!”
그중 한 명이 메뉴판을 훑으며 침을 삼키자, 또 다른 한 명이 주저 없이 외쳤습니다.
“여기, 토르티야 세 개 주세요!”
그들의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매튜는 자신의 군 복무 시절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패기만 있을 뿐 철없고 가난했던 군인 시절, 한창 젊었던 그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습니다. 서둘러 토르티야를 해치운 매튜는 계산대로 가서 조용히 피자 한 판을 주문하고 값을 치렀습니다. 그러고는 군인들이 앉은 테이블에 갖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식당을 빠져나왔지요. 낯선 사람이 건넨 이유 있는 호의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여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살 만큼만 남았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노숙은 그리 나쁘지 않을 듯했습니다. 그는 벤치에 앉아 펜과 수첩을 꺼내어 수다 맨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완행열차를 타고 전장으로 순순히 돌아갈 탈영병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갔습니다.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