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억이 머무는 곳


#1
따르릉따르릉.

조용한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업무를 알려주던 정태는 대신 받으려는 동료에게 본인이 가겠다고 손짓한 뒤 황급히 자리로 돌아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태가 통화를 마치자 옆에 앉은 동료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오늘 연락하겠다는 고객 아닌가 봐요?”

정태는 동료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중요한 계약을 쥐고 있는 고객이라 내내 연락을 기다렸던 정태는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습니다. 그때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이번에는 기다리던 전화일 거란 예감이 들었습니다.

따르릉따르릉.

“감사합….”
“춘식이냐?”
“휴….”
“아가, 엄마다.”
“어르신, 전화 잘못 거셨어요. 여기는 사무실이에요.”
“춘식이 친구라고?”
“아뇨. 사무실이라고요.”
“아유, 미안합니다.”

어르신은 아쉬워하는 말투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벌써 사흘째입니다. 아들을 찾는 어르신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이. 전화번호를 확인해보시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치매에 걸린 듯한 어르신은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걸어옵니다. 고객 전화일 거라는 생각에 한껏 기대하고 있던 정태는 기운이 죽 빠졌습니다. 허탈해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자 옆 동료가 물었습니다.

“또 그 어르신이에요?”
“네….”

동료는 정태의 눈치를 살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 참. 어르신도. 이렇게 중요한 타이밍은 좀 피해서 하시지!”
“계속 기다려봐야죠. 근데 어르신한테 매번 사무실이라며 끊는 것도 죄송하네요. 아들한테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럼 최 팀장님이 아들처럼 받아보는 건 어때요?”

동료는 컵에 남아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동료의 말에 정태는 그냥 웃어넘기면서도 ‘아들처럼’이라는 말에 가슴 한편이 아려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형이 먼저였던 엄마. 외모도 훤칠하고 학창 시절 내내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형은 엄마의 자랑이었습니다. 형을 향한 엄마의 사랑은 성인이 되어도 여전했습니다. 그날도 엄마는 형만 챙겼습니다. 모처럼 형 가족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한 며칠 전. 정태는 사업하느라 바쁜 형을 대신해 숙소와 항공권은 물론 일정까지 꼼꼼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떠날 일만 남겨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형이 여행을 보류하자고 했습니다. 급한 출장이 잡혔다면서요.

자신과 아내 역시 바쁜 일정 중에 겨우 짬을 내어 마련한 휴가인데, 형이 일방적으로 못 가게 됐다고 하니 정태는 속이 매우 상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여행 준비하느라 집에 와서도 제대로 못 쉬었던 건 생각해주지 않고 엄마까지 나서서 형의 입장에서만 얘기하니, 정태는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형과 크게 다투고는 그때부터 형과 데면데면해졌고 부모님 집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어느덧 이 년이 흘렀습니다.


#2
다음 날, 정신없이 바쁜 하루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정태는 요즘 따라 빨리 집에 오라고 보채는 다섯 살 아들이 눈에 아른거려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 짓고 책상을 정돈했습니다. 탕비실에 가서 컵을 씻어 놓고 자리에 오니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따르릉따르릉.

“감사합…”
“춘식이냐?”

그전처럼 잘못 걸었다고 말하려는 순간, 정태는 동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인 척 받아봐요.’

정태는 어르신이 계속 전화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들인 양 대해 드리면 어르신이 조금이라도 안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습니다.

“어, 엄마 어쩐 일이에요?”
“밥은 먹었냐?”
“이제 먹어야죠. 엄마는요?”
“너 오길 기다리다가 방금 먹었지. 네 형이 오늘 너 늦는다고 해서…. 늦게까지 일하더라도 밥은 꼭 챙겨 먹고.”
“밥 잘 먹고 다니니까 제 걱정은 마세요.”
“그래, 그래.”
“….”
“근데 춘식아….”
“네, 엄마.”
“그때 많이 서운했지?”

정태는 어르신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 정태가 머뭇거리자 어르신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네 졸업식도 가고 싶었는데… 네 형이 마지막 졸업식이라 안 갈 수가 없었어.”

정태는 가만히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어르신의 기억은 두 아들의 졸업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두 아들의 졸업식이 하필 같은 날이었나 봅니다. 어르신이 큰아들의 졸업식에 갔다가 집에 왔더니 작은아들이 형만 챙긴다며 서운한 기색을 내비친 듯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몸이 두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누나를 네 졸업식에 대신 보내면서도 어찌나 마음에 걸리던지…. 엄마가 미안하다.”

정태는 작은아들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형을 대하는 엄마를 보며 느꼈던 자신의 마음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어르신의 마음도 이해되었습니다. 두 아들의 졸업식이 겹쳤을 때 어르신이 속으로 얼마나 갈등을 겪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큰아들은 마지막 졸업식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학교 졸업식이었을 텐데, 부모로서 학사모를 쓴 아들과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을까요.

“엄마한테는 너도, 형도, 누나도 모두 소중하단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 그러니까 졸업식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정태는 졸업식 얘기가 나오니 문득 자신의 대학교 졸업식 때가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졸업식 며칠 전부터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고민했고, 아버지는 졸업식이 끝나면 맛있는 것을 먹자며 식당을 물색했습니다. 군 복무 중이었던 형은 어렵게 휴가를 받아 나왔습니다. 그날 학사복을 입은 정태와 군복을 입은 형, 그리고 활짝 웃는 부모님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은 거실 한편에 걸린 뒤 한 번도 다른 사진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태는 아직도 그 사진이 제자리에 걸려 있을 거라 짐작되었습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엄마.”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태는 엄마에게 품었던 섭섭한 마음까지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속에 꽁꽁 얼어있던 눈덩이가 따뜻한 햇살에 녹는 듯 서서히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3
정태는 그날 이후에도 기꺼이 어르신의 아들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대화 내용은 여전히 졸업식 얘기였습니다. 어르신은 매번 같은 고백을 하고 같은 용서를 구하면서도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진심을 다했습니다. 전화가 안 오면 정태는 어르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마음이 쓰였습니다.

따르릉따르릉.

늦은 오후, 어르신의 전화가 뜸해 안부가 궁금했던 정태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부 최정태입니다.”
“아, 저….”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문을 뗐습니다. 그는 기억을 잃으신 어머니가 매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시는 것 같은데, 누구랑 통화하는지 궁금하고 걱정돼 재다이얼을 눌러봤다고 했습니다. 정태가 회사 사무실이라고 하니 남자는 정태에게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혹시 작은 아드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이름이 춘식…?”
“네.”
“어머님이 고등학교 졸업식에 못 간 걸 많이 미안해 하시더라고요.”
“네? 그건 어떻게…?”
“어머님이 이 번호를 작은아들 집 번호로 알고 계세요. 며칠 간은 잘못 거셨다며 끊었는데 계속 전화하시기에 무슨 용건인가 싶어서 아들인 양 받았더니, 졸업식 얘기를 털어놓으시더군요.”

정태는 어르신이 했던 말들을 남자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어르신의 마음까지 전달되기를 바라면서요. 잠잠히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목멘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네…. 그랬군요. 어머니가 저도, 형과 누나도 기억을 못 하시는데, 그때 그 일은 잊지 않고 계시나 봐요.”
“마음이 많이 쓰이셨나 보더라고요…. 그나저나 어머님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허락도 없이 아들 노릇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일하는 중에 바쁘실 텐데 친절히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께는 잘 말씀드려서 앞으로 전화가 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태는 남자와의 통화를 마치며, 이제 어르신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했습니다. 그래도 어르신이 아들의 따듯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 엄마였습니다.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이해의 문이 열리자, 원망과 미움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리움과 회한만이 오롯이 남았습니다.

퇴근길, 정태는 회사 근처 백화점에 들러 과일 바구니를 샀습니다. 그러고는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고속도로로 진입했습니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평소라면 교통량이 많아 정체되는 구간이 웬일인지 막힘없이 원활했습니다.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하늘빛은 푸르고 붉었습니다. 부지런히 내달리는 자동차보다 앞선 마음이 달음질을 재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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