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룸메이트


“내일 채원이가 올 거야. 이모가 회사에서 일주일 출장이 잡혀 돌봐주게 됐거든.”
“정말요?”

엄마의 말에 진호의 표정이 환해졌습니다. 평소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던 진호는 귀여운 사촌 동생이 온다는 소식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책을 뒤적이던 수호는 그런 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대신, 채원이가 와 있는 동안 네가 형 방에서 지내야 해.”
“에, 뭐라고요? 그건 아니죠!”

진호에게 한 말인데 수호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달갑지 않아 하기는 진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수호와 진호는 서로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립니다. 수호는 진호가 중학생이 되더니 자신과 맞먹으려 한다고 못마땅해했고, 진호는 고작 두 살 위인 형이 자신을 애 취급한다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그럼 일곱 살배기를 거실에서 재울 거야? 아님, 둘 중 한 명이 그렇게 할래?”

엄마는 두 형제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말했습니다. 엄마의 팔짱은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는 무언의 통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아는 수호와 진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진호는 형이랑 같은 방을 쓰는 동안 얼마나 구박받을지 벌써 눈에 훤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엄마는 정 그러면 둘만의 생활 규칙을 정해보라며 자리를 떴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수호가 입을 열었습니다.

“… 이진호, 종이랑 펜 가져와 봐.”
“또 나한테 시켜.”

진호는 형을 노려보다 방으로 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왔습니다.

“적어. ‘일주일 룸메이트 생활 규칙’.”
“아, 형만 정하기 있어? 내 의견도 들어줘야지!”

진호가 발끈하자 수호는 한발 물러나 진호도 적게 해주었습니다. 둘은 각자의 종이에 열심히 규칙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거실로 돌아온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습니다.

“오, 벌써 정하는 거야? 빠른데?”
“난 끝!”

수호가 탁자에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자, 이에 질세라 진호도 황급히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엄마는 흥미롭다는 듯 둘의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너희 적은 거 엄마가 읽어볼게. 자기 물건 아니면 손대지 않기, 공부할 때 방해하지 않기, 자기 전에 꼭 씻기, 알람은 하나만 설정하기…”
“아니, 잠깐. 알람을 어떻게 하나만 맞춰?”

수호가 어이없다는 듯 진호를 쳐다봤습니다.

“형 알람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알아? 형 때문에 내가 잠을 깨야겠어?”

수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두 형제가 쓴 내용을 훑어보고는 각각의 종이에 항목 하나를 똑같이 썼습니다. 그걸 본 수호와 진호가 펄쩍 뛰며 엄마를 말렸습니다.

“엄마, 그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맞아요. 좀 아닌 것 같아요. 빼주세요.”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 추가한 항목에 별표까지 그리며 제일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일주일간 이 규칙들을 잘 지켜서 싸우지 않고 지내면 각자 원하는 것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고도 덧붙였지요.

“대신, 창피하게 채원이 앞에서 맨날 싸우면 너희가 엄마 아빠 원하는 것 들어줘야 돼!”

그렇게 수호의 방에는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붙었습니다.



저녁 늦게 책상에 앉아 숙제에 몰두하던 진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수호 방에서 생활한 지 삼 일째.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형의 방 구조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습니다. 진호는 요기라도 할 생각으로 몸을 숙여 책상 서랍의 맨 마지막 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넣어두었던 간식이 또 사라졌습니다. 진호는 고개를 홱 돌려 수호를 노려봤습니다.

“형!”
“깜짝이야. 조용히 얘기해도 들려. 왜?”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핸드폰을 보던 수호가 건성으로 대꾸했습니다. 진호는 화난 목소리로 간식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수호는 자기 서랍에 있길래 먹었다고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아니, 자기 물건 아니면 손대지 않기로 했잖아!”
“그깟 과자 하나 갖고 그렇게 정색을 하냐!”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이거 지키라고 정식으로 요구한다, 응?”

수호의 시선이 벽 중앙에 붙어 있는 종이, 그중에서도 별표가 쳐진 항목으로 향했습니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할 때는 무조건 미안하다고 말하기. 상대방이 미안하다 할 때는 괜찮다고 하며 웃기.’

며칠 전 엄마가 이 항목을 적었을 때, 두 형제는 상상만으로도 손과 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 이것만큼은 지키지 않아도 서로 봐주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한방을 쓰려니 기분 상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럴 때마다 이 항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치면 나도 너한테 사과받을 일 많거든! 이거 안 보이냐?”

수호는 입고 있는 티셔츠의 소매 부분을 들어 보였습니다. 진호가 수호 방에 온 첫날, 누가 침대에서 잘지를 두고 몸싸움을 벌이다 진호가 수호 옷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소매가 형편없이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진호는 형이 아끼는 티셔츠인 것을 알았지만 당황한 나머지 되레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그, 그 얘기까지 왜 꺼내? 와, 진짜!”

그때, 방문을 열고 채원이가 들어왔습니다.

“오빠들 뭐해?”

미주알고주알 말하기 좋아하는 채원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간 엄마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수호는 채원이 덕 본 줄 알라는 듯 진호를 흘겨보고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채원이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수호가 다시 방에 들어왔을 때, 진호는 씻으러 가고 없었습니다. 대신 책상에는 공책 하나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수호는 궁금한 마음에 공책을 들여다봤습니다. 진호가 과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우리 형’을 주제로 쓴 글이었습니다.

“당분간 형과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첫날부터 형의 옷을 망가뜨려 싸우긴 했지만. 가까이서 본 형은 배울 점이 꽤 있는 것….”

생각지 못한 내용에 수호가 공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머리에 묻은 물을 털며 방으로 걸어오던 진호가 수건을 팽개치며 달려왔습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남의 걸 마음대로 읽어?”

진호는 민망한 마음에 수호의 손에서 황급히 공책을 빼앗았습니다.

“왜 또 큰소리야?”
“형이 쓴 게 아니면 읽지 말아야지.”

진호는 공책을 덮어 책상에 소리 나게 툭 내려놨습니다. 빈정이 상한 수호는 “형한테 왜 이래라 저래라야?” 하고 언성을 높였고, 진호는 “형은 맨날 마음대로야”라며 맞받아쳤습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빠끔 열었습니다. 손에 블록을 쥔 채원이었습니다.

“진호 오빠, 이것 좀 빼줘!”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던 수호와 진호는 한숨을 쉬며 각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채원이는 그런 오빠들을 번갈아 쳐다보다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빠들 화 났어? 우아, 근데 수호 오빠 방에 책 진짜 많다. 어, 저건 뭐야?”
방을 휘 둘러본 채원이가 ‘일주일 룸메이트 생활 규칙’이라고 적힌 종이를 가리켰습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채원아, 우리 거실로 가볼까?”

채원이는 진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활 규칙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할 때는, 무조건, 미안하다고, 말하기. 와, 여기 별도 그려져 있어!”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던 채원이가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근데 오빠들 아까 서로 기분 나빠 했잖아. 왜 미안하다고 안 해?”
“어?”
“채원아, 그게 말이야.”

갑작스러운 검문(?)에 수호와 진호 모두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채원이는 “이모가 오빠들 싸우는 거 보면 얘기해 달랬어”라며 당장이라도 방을 나갈 것처럼 몸을 돌렸습니다. 평소 채원이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진호가 먼저 눈을 질끈 감고 말했습니다.

“에잇, 형. 미안해.”

수호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어설픈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습니다.

“괜… 괜찮아, 동생아. 나도 미안해. 하하.”

눈을 뜬 진호는 그런 형의 얼굴을 보고 “풉”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수호도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이게 뭐라고. 이 상황 너무 웃긴다.”
“근데 이상하게 화가 풀리네.”

수호와 진호는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채원이도 덩달아 함께 웃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무사히 지났습니다. 채원이는 집으로 돌아갔고 진호는 자신의 방을 되찾았지요. 이모는 채원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며 고기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 날, 수호랑 진호가 열심히 고기를 집어가고 어느새 접시에는 고기 한 점만 남았습니다. 수호는 잽싸게 젓가락을 들어 마지막 남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자 진호가 멈칫하며 말했습니다.

“아,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그래? 미안해.”
“괜찮아.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진호는 남은 밥을 마저 먹으며 생긋 웃었습니다.

“뭐야, 웬일이야?”

아빠가 놀란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붙여 놨더니 저렇게 사이가 좋아졌지 뭐예요. 앞으로 몇 주 더 같은 방을 쓰게 할까 봐요.”
“엄마!”
“엄마, 그보다 저희 소원 들어주셔야죠.”

수호와 진호는 몸서리를 치며 화제를 돌렸습니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수호가 생각해 둔 게 있었다면서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진호가 좋아하는 간식 사주세요.”

수호는 자기가 진호 간식을 매번 뺏어 먹었다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진호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저는요…, 형 옷을 새로 사주셨으면 해요. 제가 늘려놓은 거요.”
“에이, 기분이다! 너희 둘 다 옷이랑 간식 사줄게.”

아빠의 말에 수호와 진호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온 가족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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