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메신저


모처럼 일을 일찍 끝내고 회사를 나서는 그레디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오랜만에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거든요. 집에서는 아내 엠마가 그레디를 기다리며 허니브레드에 어울릴 만한 로제파스타를 만들고 있습니다. 빵에 올릴 토핑은 준비됐으니 아침에 그레디에게 부탁한 식빵만 있으면 오늘 저녁은 완성입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엠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레디를 맞으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고생했어요. 배고프죠?”
“조금요. 에반이 안 보이네요.”
“아까 잠들었어요. 저녁 준비 다 되면 깨우려고요.”

엠마는 그레디의 손을 살폈습니다.

“근데 식빵은요?”

그레디는 아차 싶어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엠마가 아침에 한 부탁이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허니브레드를 만들 계획이니 식빵을 꼭 사 오라고 했었지요. 분명 오후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퇴근할 때쯤 들어온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까맣게 잊었습니다.

“내 정신 좀 봐. 깜박했어요….”
“이럴까 봐 여러 번 얘기했던 건데. 그 집 식빵이 부드럽단 말이에요. 이제 내 부탁은 안 들어주기로 한 거예요? 맨날 깜빡했다고만 하고….”

엠마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세탁소에 맡긴 세탁물 찾아 오기, 약 사 오기, 고장 난 물건 서비스 센터 맡기기 등 엠마가 어쩌다 한번 하는 부탁을 그레디는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엠마는 실망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레디는 미안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진짜 미안해요. 그리고 메뉴가 허니브레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좀 먹으면 어때요.”

그 말에 엠마는 그레디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허니브레드 못 먹게 돼서 이러는 것 같아요?”
“어, 아니에요?”
“에휴, 정말. 에반 깨워 와요. 저녁 먹게요.”

엠마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레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엠마를 쳐다보다 몸을 돌렸습니다.

‘하여튼 식빵 두 번 안 사 왔다가는 큰일 나겠네. 어유, 무서워.’

왠지 뒤통수가 따가운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에반의 방으로 가는데, 뒤에서 엠마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이유를 설명하면 뭐해, 매번 똑같은데.”

그 말에 그레디는 빈정이 상했습니다.

‘엠마랑은 정말 말이 안 통해.’

그레디가 출근길에 에반을 학교에 데려다주기로 했습니다.

“에반!”

에반의 등교 준비로 분주한 아침 시간, 그레디가 부르는 소리에 에반이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갑니다. 어제 저녁부터 에반은 엄마 아빠와의 메신저 놀이(?)에 푹 빠졌습니다. 말 그대로 에반이 엄마 아빠 사이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하는 건데, 반응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허니브레드 사건으로 마음이 상한 그레디가 생각한 나름의 소통 방법입니다. 처음에 엠마는 에반을 통해 말을 거는 그레디의 행동이 유치해서 헛웃음을 쳤지만 똑같이 에반을 통해 말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옷장 앞을 서성이던 그레디는 에반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엄마한테 초록색 셔츠 어디에 뒀는지 물어봐 줄래?”

에반은 총알같이 엠마에게로 달려가 그레디의 말을 전했습니다. 엠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습니다.

“에반, 아빠한테 엄마는 정리한 적이 없어 모른다고 전해주렴.”

잠시 후, 에반이 안방으로 돌아와 천진한 얼굴로 그레디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엄마가 모르겠대요. 어떡해요?”
“괜찮아. 다른 거 입으면 돼. 아빠 옷 갈아입고 얼른 나갈게.”

눈썹을 찡그리며 고민하던 그레디는 에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흰색 셔츠를 꺼냈습니다.

“아빠, 엄마가 지각하기 전에 빨리 가래요. 빨리요, 빨리!”
“에반, 엄마한테 너무 재촉하지 말라고 전해줘. 마음이 급해져서 단추가 잘 안 잠긴다고 말야.”

에반은 킥킥 웃으며 현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아빠가 단추만 잠그고 빨리 나오시겠대요.”

우여곡절 끝에 준비를 마친 그레디가 방에서 나왔습니다. 맞은편에서 지켜보는 엠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모른 체하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지요. 엠마는 엠마대로, 그레디의 넥타이가 비뚤어진 걸 보고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에반이 그레디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며 말했습니다. 엠마는 웃으며 에반을 배웅해 주었습니다. 에반은 들떠서 그레디의 차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에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내일 캠핑 가잖아요! 친구들이랑 텐트에서 잘 생각에 엄청 기대돼요.”

그레디는 깜짝 놀라 되물었습니다.

“캠핑? 내일이라고? 다음 주 아니었어?”

에반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에반과 달리 그레디의 얼굴빛은 어두워졌습니다.



에반이 캠핑을 간 날, 일을 마친 그레디는 집으로 가다가 멈칫했습니다.

‘맞다. 오늘 에반이 없는 날이지.’

그레디는 발걸음을 돌려 빵집으로 향했습니다. 엠마한테 저녁을 준비해 달라고 하기가 뭣한 상황이라 저녁은 간단하게 빵으로 때울 참이었습니다. 마감 시간이라 그런지 빵집의 매대는 거의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바게트나 샌드위치는 없나요?”
“다 팔렸습니다. 현재는 이 빵밖에 남은 게 없는데요.”

주인이 가리킨 것은 허니브레드였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걸로 주세요.”

집에 도착한 그레디는 식탁 위에 허니브레드를 올려놓고 씻으러 갔습니다. 인기척에 엠마가 방문을 빼꼼 열고 밖을 살폈습니다.

“뭘 사 왔나 보네.”

엠마는 그레디가 두고 간 봉지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엠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잖아!”

엠마는 그레디가 직접 사과하기 쑥스러워서 빵으로 화해를 청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났습니다. 허니브레드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잠시 뒤 다시 주방에 온 그레디는 빈 빵 봉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엠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안 그래도 먹고 싶었는데…. 맛있네요.”
“그… 그래요.”

그레디는 자신이 먹으려고 사 온 빵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엠마의 환한 웃음을 보니 이참에 화해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죠.

“우리 예전에 자주 먹었잖아요. 요즘도 종종 생각나는데 집 주변에는 파는 곳이 없더라고요.”

엠마의 말에 그레디는 둘이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엠마는 디저트로 허니브레드를 주문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레디는 엠마를 만날 때면 늘 허니브레드를 사기 위해 빵집을 들렀습니다.

“그때 생각도 나고 해서 직접 만들어보려고 했던 거예요.”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사 왔을 텐데….”
“그래서 식빵 사 오라고 했었잖아요.”

그레디는 멋쩍게 웃으며 그렇게 좋아하는 빵 한번 사줄 생각을 못한 것에 엠마에게 미안했습니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나서 세세하게 신경 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는 그레디를 엠마가 불러 세웠습니다. 엠마는 그레디에게 도시락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점심 사 먹지 말고 이거 먹어요.”
“어… 고마워요.”

그레디는 생각지 못한 도시락을 어색하게 받았습니다. 엠마가 싸준 도시락에는 그레디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습니다. 엠마에게 고맙고 미안해진 그레디는 오늘 저녁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마음껏 먹게 해주려고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맞췄습니다.

‘빵집 방문’



집에 돌아오니 에반이 그레디를 반갑게 맞습니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재밌었니?”
“완전요!”

에반은 그레디의 품에 폭 안겼습니다. 그러고는 주방에 있는 엄마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한테 식사하시라고 할까요?”
“그래. 아빠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구웠다고 얼른 오시라고 전해주렴.”

에반은 스테이크란 말에 활짝 웃으며 그레디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스테이크래요! 아빠는 엄마한테 할 말 없어요?”
“그럼 엄마한테 이거 전해줄래?”

에반이 전해준 봉투에는 엠마가 좋아하는 빵이 한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그레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합니다. 엠마가 요리한 스테이크를 먹는 그레디와 그레디가 사 온 빵을 먹는 엠마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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