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도 없이 깨끗하군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다양한 동물들이 사는 숲속 마을 ‘어울림’. 마을 회장 오리너구리가 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무겁게 입을 뗐습니다. 오리너구리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지난밤, 누군가 몰래 마을 동굴에 들어와 동물들이 비축해둔 양식을 다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다들 충격이 컸습니다. 텅 빈 동굴을 발견한 동물들의 제보가 아침 일찍부터 이어져, 오리너구리와 몇몇 동물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을 찾았습니다.
“남긴 증거도 딱히 없고, 도둑을 본 목격자도 없어서 큰일이네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
오리너구리의 말에 여우, 비버, 다람쥐, 사슴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젯밤에 동굴에서 나오는 동물을 봤어요.”
나무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동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코알라였습니다.
“당신이 봤다고요?”
여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습니다. 동물들은 늘 잠만 자는 코알라의 말이 못 미덥긴 해도 유일한 목격자이기에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잎을 하나 뜯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잠결에 배고파서 이렇게 잎을 먹고 있었어요. 누군가 동굴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꿈인가 했네요.”
“그럼 그게 어떤 동물이었나요?”
사슴이 빠르게 물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처음 본 동물이라. 얼굴만 조금 기억나는데…, 도움이 될까요?”
코알라는 난감한 듯 손에 쥔 잎을 잘게 찢으며 우물쭈물했습니다.
“그럼요. 특징을 얘기해주면 제가 얼굴을 그려볼게요.”
다람쥐가 종이와 펜을 꺼내며 말했습니다.
“음… 되게 귀엽게 생긴 동물이었어요. 얼굴이 동그라니 아주 작고, 눈은 콩알만 하고 까맸어요. 코는….”
코알라는 갑자기 졸음이 오는지 크게 하품을 했습니다. 다람쥐가 그런 코알라를 재촉했습니다.
“계속 말씀해보세요.”
“코는… 그러니까 코는요…. 하암.”
코알라는 감기는 눈을 애써 떠보려 했지만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한번 잠들면 하루를 꼬박 자기에 비버가 얼른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코알라는 간신히 눈을 떴습니다.
“죄송해요. 어제 열아홉 시간밖에 못 잤거든요. 계속 눈이 감기네요. 어디까지 얘기했죠?”
“코가 어떻게 생겼다고요?”
다람쥐는 코를 그리기 위해 코알라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아, 코…! 코는 세모났어요. 물에서 나왔는지 털은 젖어 있었고요. 그리고 또 뭘 봤더라….”
코알라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소록소록 잠들었습니다.
“깨워야 할까요?”
오리너구리는 다람쥐에게 그만하면 됐다는 듯 손짓했습니다. 동물들은 대강 그린 몽타주를 보며 어떤 동물인지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동물이 없었습니다.
“가만 보자. 어, 해달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눈썰미 좋은 여우의 말에 나머지 동물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네요. 해달이네요! 생각해보니 제가 밤에 돌아다닐 때 해달을 자주 봤었어요.”
비버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졌습니다.
오리너구리는 곧바로 해달들이 노는 바다로 갔습니다. 오리너구리는 해달들에게 사건이 발생한 날에 무슨 일을 했는지 일일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별이가 사라졌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별이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간만에 마을에서 가장 큰 자이언트 나무에 벽보가 붙었습니다.
‘정오에 마을회관에서 긴급회의를 진행합니다.’
긴급회의가 열린다는 건 사안이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해달 별이는 마을회관으로 소환되었고, 동물들은 시간에 맞춰 회관으로 모였습니다.
강당 중앙에 별이가, 그 맞은편에는 마을 회장 오리너구리와 여우, 비버, 다람쥐, 사슴이 앉아 있었지요. 회의에 참석한 동물들은 순진한 별이가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자, 다 모이셨나요?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해달 별이에게 묻겠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어디서 무엇을 했나요?”
오리너구리는 별이가 긴장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별이는 동물들의 뜨거운 시선에 손으로 양 볼을 감쌌습니다.
“그게….”
별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시작했습니다.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하도 요란해서 잠에서 깼어요. 그날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하기로 한 날이었거든요. 혹시라도 파도에 떠내려갈까 봐 잠들기 전 친구들이랑 손을 꼭 잡았어요. 다시 자려고 했는데, 저 멀리 혼자 있는 작은 해달 한 마리가 보이는 거 있죠? 해초로 몸을 감고 있어도 위태로워 보였어요. 밤이 깊어지면 파도가 더 세질 텐데 … . 저는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놓고 열심히 헤엄쳐서 그 해달에게 다가갔어요. 가까이서 보니 몸에 감아놓은 해초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더라고요. 곤히 잠든 친구에게 해초를 잘 감아주었어요.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렸어요. 왜냐하면….”
“그때 동굴로 향했나 보군요!”
사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별이의 말에 끼어들었습니다.
“아니요. 다시 그 해달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어요.”
별이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했습니다. 별이가 심호흡을 하고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그냥 가려니 그 친구가 계속 눈에 밟혔어요. 엄마의 말이 생각났거든요. 이전에 엄마가 제게 ‘거센 파도에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어요. 저는 자신 있게 답했죠. 해초에 몸을 감으면 된다고요. 그랬더니 엄마는 다시 물어보셨어요.
“만일 해초가 없는 곳이면 어떡하지?”
저는 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셨죠.
“다른 해달들과 함께하면 된단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서로 손을 잡아주면 돼. 그럼 강한 파도가 와도 끄떡없단다.”
저는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그 친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죠.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만 까무룩 잠들어버렸답니다. 날이 밝았을 때 그 친구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제 손에 예쁜 조개를 남긴 채요.
“이게 바로 그 조개예요.”
별이는 주머니 속에서 조개를 꺼내 보여줬습니다. 동물들은 “그럼 대체 범인이 누구냐”며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강당 문이 열렸습니다. 코알라가 멋쩍은 얼굴로 들어섰습니다.
“벽보를 이제 봤어요. 아직 안 끝났죠? 근데 저 친구는 왜 나와 있나요?”
“마침 잘 왔어요. 몽타주를 한번 봐주세요.”
여우의 요청에 코알라는 몽타주를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코를 이렇게 그리면 안 돼요. 삼각형을 이렇게 말고 반대로. 제가 이 얘기를 안 했나요?”

다람쥐가 재빨리 몽타주의 코를 고쳐 그리니 새로운 얼굴이 나왔습니다. 동물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동물에게로 집중됐습니다. 얼마 전 이곳으로 이사 온 수달이었습니다. 수달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저, 저 아니에요. 그런 동굴이 있는 줄도 몰랐는걸요.”
“어? 저 동물이 맞아요.”
코알라가 수달을 가리켰습니다. 수달은 그제야 자신의 범행을 인정했습니다.
“죄송해요. 일이 이렇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그날 배가 너무 고팠거든요.”
사건이 일어난 날, 수달은 물고기를 잡으러 물가로 내려갔지만 물살이 세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마을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다 먹을거리가 가득 든 동굴을 발견한 수달은 허겁지겁 그 안의 양식을 먹고 나머지는 제 동굴로 가져간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버려진 동굴인 줄만 알았어요. 여러분들이 보관해놓은 양식인 줄 알았다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수달은 믿어달라며 두 손을 꼭 움켜쥐었습니다. 오리너구리는 잠시 곁의 동물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소동은 수달이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새 이웃이고 마을 사정에 밝지 않아 벌어진 일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수달은 이달 안에 마을 동물들의 양식을 도로 채워 넣도록 하세요. 그럼 피해를 입은 동물들도 잘못을 용서해줄 것입니다.”
오리너구리의 말에 동물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리너구리는 별이를 바라봤습니다. 오리너구리의 시선에 따라 동물들도 별이를 바라봤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별이의 선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날 별이가 위험에 처한 해달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해달은 파도에 휩쓸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별이처럼 이웃을 생각하고 돕는 마음을 가진다면 마을이 더욱 평안할 거라 생각합니다. 모두 별이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오리너구리가 손을 들어 박수를 치자 나머지 동물들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별이는 얼굴이 빨개져 재빨리 손으로 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 것은… 그저 손잡아준 것밖에는 없는 걸요….”
회의가 끝나고 동물들은 별이에게 다가와 엄지를 치켜세우고 등을 토닥여주었습니다.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달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수달의 어깨를 톡톡 쳤습니다. 별이였습니다.
“양식 구하러 가시나요? 도와드릴게요.”
“우리도요!”
별이의 말에 다른 동물들도 하나둘 따라나섰습니다. 수달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어울림 마을의 동굴이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채워질 것 같습니다.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