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는 의자 위에 서서 까치발을 들고 옷장 위로 팔을 쭉 뻗었습니다. 에밀리는 제이미의 등 뒤에서 주먹을 꼭 쥔 채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오빠! 조금만, 조금만 더!”
“윽, 팔 늘어나겠다.”
제이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옷장 위 구석진 곳에 놓인 상자에 손끝이 겨우 닿았습니다.
“잡았다!”
제이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자를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습니다. 반짝이는 자물쇠가 채워진 이 상자는 바로 제이미 가족의 타임캡슐입니다. 오늘은 일 년 동안 봉했던 타임캡슐을 여는 날이고요. 제이미는 상자를 귀 옆에 대고 흔들어보았습니다. 안에 든 물건들이 달그락거렸습니다.
“에밀리, 이 안에 뭐 넣었는지 기억나?”
“응. 당연하지! 헤헤, 빨리 열어보고 싶다.”
작년 이맘때, 가족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타임캡슐을 꾸렸습니다. 그 안에는 각자의 추억이 담긴 물건과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았습니다. 편지에는 일 년 동안 실천할 자신과의 약속을 적었지요. 남매가 상자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하자 엄마가 다가왔습니다.
“제이미, 타임캡슐 꺼내는 데 성공했구나. 대단한걸?”
엄마는 일 년 새 많이 컸다며 제이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웠습니다.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렴. 이따가 아빠 오시면 같이 열자!”
엄마의 말에 제이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습니다. 요즘 들어 아빠는 일찍 퇴근하는 날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회사 일로 바쁘신 거라지만 아빠랑 같이 놀고 싶은 제이미는 내심 섭섭했습니다.
“네. 오빠, 가자!”
에밀리가 제이미를 재촉했습니다. 둘은 설레는 마음으로 상자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아빠는 다행히 이날 일찍 왔습니다. 제이미의 가족은 얼른 식사를 마치고 타임캡슐을 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자, 그럼 다 같이 일 년 전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볼까요?”
아빠가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습니다. 제이미와 에밀리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려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우아!”
상자가 열리자 에밀리가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상자 안에는 제이미의 장난감 자동차부터 엄마의 다이어리와 아빠의 낡은 지갑, 에밀리의 구슬 반지까지 다양한 물건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을 새삼스레 살펴보는데 엄마가 상자에서 편지 봉투 네 개를 꺼냈습니다.
“이제 ‘자신과의 약속’은 잘 지켰는지 점검할 시간! 누가 먼저 해볼까요?”
엄마의 말에 에밀리가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에밀리는 자신과의 약속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밥 남기지 않기’, ‘혼자 옷 입기’ 등 깨알 같은 다짐이었지요. 에밀리가 약속을 잘 지킨 것 같냐는 엄마의 질문에 아빠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아까도 보니까 채소까지 남김없이 잘 먹던걸요.”
에밀리는 씩 웃으며 아빠와 하이 파이브를 했습니다. 다음은 엄마 차례였습니다. 엄마의 약속은 ‘가족에게 잔소리보다 칭찬 많이 하기’였습니다. 아빠는 엄마가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가족들이 잘해준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아빠가 편지를 열었습니다.
“흠흠, 나와의 약속. 올해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팔에 슈퍼맨 근육을 만들 것이다. 지키지 못할 시에는 다가오는 일요일에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다녀오겠다. 이상!”
아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에 힘을 불끈 주었습니다. 하지만 ‘슈퍼맨 근육’은 보이지 않았지요. 엄마는 호호 웃으며 놀이공원에 잘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이미가 편지를 꺼냈습니다.
“제이미에게. 제이미, 올해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동생을 잘 돌보는 착한 아이가 되자. 그럼 안녕. 어, 추신도 있네! 다짐을 못 지키면 조립 블록을 에밀리에게 주겠습니다. 엥?”
조립 블록은 제이미가 무척 애지중지하며 모으는 장난감입니다. 깜짝 놀란 제이미에게 아빠가 물었습니다.
“제이미 다짐도 굉장한걸. 자신과의 약속, 얼마나 지킨 것 같아?”
“별로 못 지킨 것 같은데. 오빠 맨날 늦잠 자잖아!”
제이미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에밀리가 말했습니다. 제이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실은 적어놓고 다 잊어버렸어요. 약속 지킬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돼요?”
제이미는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에밀리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에밀리는 오빠 블록이 갖고 싶었지만, 울상이 된 제이미를 보고 마지못해 좋다고 했습니다.
“잠깐! 그럼 공평하게 나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아빠가 외쳤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제이미에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기한은 딱 일주일! 다음 주에 타임캡슐을 새로 만들 때까지, 약속을 잘 실천해서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벌칙을 면해주기로 했습니다. 엄마는 가족들이 잘 볼 수 있게 냉장고에 아빠와 제이미의 편지를 붙여두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제이미는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시계를 끄고 습관처럼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침대로 파고들던 제이미의 귀에 조잘거리는 에밀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오빠는 어제 일을 벌써 잊었나 봐요. 여기 편지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라고 써 있는데!”
그 소리에 제이미는 몸을 벌떡 일으켜 눈을 비비며 식탁으로 나왔습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아빠가 겉옷을 걸치며 제이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빠랑 운동 가자. 이제 아빠 일찍 퇴근할 수 있거든. 어때?”
아빠는 슈퍼맨 근육을 만들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같은 처지끼리 서로 돕자고 덧붙였습니다. 제이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요. 어제 오랜만에 일찍 자려고 하니까 잠이 안 와서 힘들었거든요.”
그러고는 에밀리를 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잠이 잘 오겠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성공해서 제 블록 지킬 거예요!”
서로 바라보는 제이미와 에밀리 눈빛에 순간 불꽃이 튀었습니다.
“제이미, 네 약속 중에 ‘동생 잘 보는 착한 어린이 되기’가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지?”
엄마가 아이들 앞에 샌드위치를 놓으며 두 남매를 타일렀습니다.
그날 저녁, 아빠와 함께 신나게 운동한 제이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찍 곯아떨어졌습니다. 다음 날 일어날 때도 몸이 가뿐했지요. 제이미는 아침을 먹으며 아빠에게 오늘도 운동하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오, 아빠야 좋지!”
반가워하는 아빠와 달리, 에밀리는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엊저녁에 오빠가 없어서 심심했거든요. 토라진 에밀리는 접시에 남은 소시지를 포크로 콕콕 집어 입속에 한번에 욱여넣고 쌩하니 일어섰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제이미는 집에 오자마자 방으로 쏙 들어가 책을 펼쳤습니다. 에밀리는 방문 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습니다.
“오빠, 나랑 놀자. 숙제는 이따 하면 되잖아.”
“이따가 아빠랑 나가야 해서 지금 해야 해.”
제이미는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에밀리는 방으로 들어와 선반에서 조립 블록을 꺼냈습니다.
“어? 뭐해!”
“미리 받은 셈 칠게. 동생 잘 돌보는 오빠 되겠다며. 그 약속은 하나도 안 지키고 있잖아!”
에밀리는 새침하게 쏘아붙이고 총총거리며 나갔습니다. 화가 난 제이미는 에밀리를 쫓아갔습니다.
“야, 네가 이렇게 얄밉게 구는데 어떻게 잘해주냐?”
제이미가 언성을 높이자 엄마가 다가왔습니다. 왜 그러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에밀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제이미는 머리끝까지 약이 올랐습니다. 블록을 가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지요. 그러자 에밀리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에밀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오빠가 놀자고 하는데 싫다길래 블록을 가져왔어요. 오빠는 아빠만 좋아하고, 나한테는….”
에밀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빠한테 서운했구나. 오빠가 에밀리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 같네.”
씩씩대며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이던 제이미는 놀랐습니다. 에밀리가 자신에게 서운해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번 주 내내 아빠랑 운동하느라 에밀리는 뒷전이었습니다.
‘나도 아빠가 안 놀아주실 때 서운했는데…. 그리고 좋은 오빠 되기로 약속한 건 사실이잖아.’
제이미는 에밀리에게 미안했습니다. 이제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날, 제이미는 운동하러 갈 채비를 하며 일부러 크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부터는 에밀리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아빠는 좋은 생각이라며 에밀리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에밀리는 잠시 고민하다 못 이기는 척,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났습니다.
“오빠 때문이 아니고, 아빠가 부르셔서 가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밀리는 벌써 기분이 풀린 눈치입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럼, ‘제이미는 자신과의 약속을 모두 잘 지켰다’에 다들 찬성이지?”
엄마의 말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에밀리도 “네!” 하고 힘차게 소리쳤지요. 새로운 타임캡슐을 만드는 날, 제이미는 가족들로부터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켰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엄마는 제이미가 운동하러 갈 때 에밀리를 잘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했다며 착한 오빠라고 칭찬했습니다.
“제이미는 좋겠다. 아빠는 너희들 놀이공원에 데려갈 준비할게.”
아빠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빠는 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슈퍼맨 근육 만들기에 실패해서 벌칙을 받게 됐거든요. 제이미와 에밀리는 놀이공원이라는 말에 크게 환호했습니다.
“자, 이제 일 년 후의 자신에게 다시 편지를 쓰는 시간입니다.”
엄마가 편지지와 봉투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각자 열심히 편지를 쓰는데, 제이미가 뭔가 떠오른 듯 펜을 내려놓고 에밀리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엄마 아빠는 궁금한 듯 둘을 쳐다봤습니다. 잠시 후,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블록을 나눠 준다고? 오빠 진짜 최고다!”
에밀리는 두 팔 벌려 제이미를 안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습니다.
“와, 제이미의 올해 다짐도 기대되는걸?”
“올해는 ‘부모님께 잘해드리기’ 어때! 하하.”
엄마 아빠의 말에 제이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다시 펜을 들고 거침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는 제이미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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