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해결사 라비


“형, 지금 이 소리 들려?”

토끼 라비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귀가 큰 만큼 멀리서 나는 소리도 잘 듣는 라비는, 숲속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라비의 말에 형 토비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너구리랑 여우 목소리 아냐? 느티나무 쉼터 쪽에서 들리는데, 둘이 싸우나 봐!”
“그치? 내가 한번 가봐야겠어.”

낙엽 더미를 포근한 방석 삼아 앉아 있던 라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라비는 문제가 생긴 곳이라면 해결사를 자처하며 어디든 달려갑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너구리와 여우의 싸움을 말리러 갈 참인 거죠.

“라비, 지금 나간다고? 우리 밥 먹기로 했잖아.”
“아이, 금방 올 거야. 밥은 갔다 와서 먹자.”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너무 늦으면 먼저 먹을 거야!”

토비는 느티나무 쉼터를 향해 달려가는 라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느티나무 쉼터는 동물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의 오래된 느티나무 밑동에 자리한 작고 아늑한 굴입니다. 동물들이 쉴 만한 곳으로 제격이라 ‘느티나무 쉼터’라 불리지요. 그런데 굴이 작다 보니 쉼터를 차지하려는 동물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일어납니다.

“잠깐이면 된다더니 벌써 몇 분째야? 나도 좀 쉬자!”
“아직 다리가 아픈 걸 어떡해. 너무 재촉하지 마.”

너구리는 쉼터를 독차지하고 있는 여우에게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너구리가 큰소리를 내자 재밌는 구경인 양 길을 지나던 동물들이 모여들었지요. 라비는 여우와 너구리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무리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왜들 싸우고 그래. 우선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해줘. 내가 도와줄게.”

라비가 등장하자 동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너구리는 무언가 말을 이어가려다 라비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이전에 장난꾸러기 라쿤과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는데, 중재자로 나선 라비가 무슨 일인지 하도 집요하게 묻는 바람에 성가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구리는 그 일이 생각나 서둘러 싸움을 멈추고 길을 떠났습니다. 지켜보던 동물들도 수군거리다 하나둘 자리를 떠났지요.

‘뭐야, 내가 오니까 금방 상황이 정리됐잖아?’

라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물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기 청설모 모리가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안녕? 모리. 지금 뭐 하고 있어?“
“내가 숨겨놓은 호두를 찾고 있어. 분명 여기에 숨겨놨는데….”

모리는 숲속 나무들을 열심히 오르내리며 온종일 모은 호두들을 땅속에 꼭꼭 숨겨놨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까마귀한테 들킬까 봐 낙엽으로 덮어놓기까지 했다고요. 그런데 먹이를 더 구하러 멀리까지 다녀온 사이 호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모리는 아무래도 까마귀가 와서 먹어버린 것 같다며 걱정했습니다. 라비는 하염없이 땅을 파고 있는 모리가 안쓰러웠습니다.

“내가 찾아줄게. 넌 피곤할 테니 느티나무 쉼터에 가서 쉬었다 와도 좋아. 지금은 아무도 없을 거야.”
“정말 그래도 돼?”
“응, 낙엽으로 덮어두었다 했지?”

잠시 망설이던 모리는 가벼운 걸음으로 쉼터로 향했습니다. 라비는 낙엽을 들추며 모리가 숨겨놓은 호두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모리의 엄마와 마주쳤습니다.

“열심히 낙엽을 뒤적이길래 우리 모리인 줄 알았는데, 라비구나.”
“모리는 지금 느티나무 쉼터에서 쉬고 있어요. 힘들게 숨겨놓은 호두들을 잃어버렸다며 풀이 죽어 있길래 제가 대신 도와주고 있었어요. 벌써 두 개나 찾았어요.”

라비는 뿌듯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호두들을 꺼내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모리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라비, 그건 모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야. 우리 청설모들은 어려서부터 먹이 찾는 법을 익힌단다. 스스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야. 모리를 생각해준 건 고맙다만 다음에는 이런 도움은 안 줬으면 좋겠구나.”

라비는 칭찬은커녕 도리어 자신을 나무라는 모리 엄마의 말에 당황했습니다. 라비는 힘이 쭉 빠져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터덜터덜 걸어오는 라비를 보고 토비가 다가왔습니다.

“금방 온다더니, 무슨 일 있었어? 왜 기운이 하나도 없어?”

라비는 토비에게 쉼터에서 있었던 일과 모리를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토비는 시무룩한 라비를 토닥여주었습니다.

“형, 나는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왜 다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너무 상심하지 마, 라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만 한 가지 조언해줄 수는 있어.”
“조언? 뭔데?”

라비가 축 늘어뜨렸던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내가 그동안 경험해본 결과, 남을 도와줄 때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 같아. 무조건 나서면 참견처럼 느끼는 것 같더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일단 가만 있으라고? 나는 자신 없어….”
“아예 나서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지. 그러려면 웬만한 일에는 들려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필요해.”

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토비의 말을 되뇌었습니다.

‘들려도 모르는 척, 들려도 모르는 척….’



라비가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물들이 느티나무 쉼터 주변에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라비는 무슨 일인가 싶어 동물들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여우가 굴속에 들어가 있는 너구리에게 따지듯 얘기했습니다.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아직 피로가 안 풀렸어. 정 기다리기 힘들면 다음에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여우와 너구리의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물들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뭐야, 저 둘은 또 싸우고 있잖아. 지금이 형이 말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일까?’

라비는 자기가 오자 하나둘 자리를 떠나던 동물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괜히 울적해졌습니다. 그리고 왠지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비는 다시 동물들을 비집고 나와 기분 전환도 할 겸 느긋하게 먼 길로 돌아 걸었습니다. 숲속 깊숙한 곳을 지날 때쯤, 나뭇가지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모리를 봤습니다.

‘외진 길이라 해가 지면 위험할 텐데….’

라비는 모리를 깨울까 고민하다가 지난번처럼 이곳에서 뭔가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비는 모리를 지나쳤습니다. 집을 향해 한참 산을 내려가는데 모리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리야, 모리야!”

라비는 모리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괜한 참견을 하는 건 아닐까 싶어 꾹 참았습니다. 모리 엄마는 계속 모리를 찾아다녔습니다. 다른 동물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아무도 모리를 보질 못했다고 하는군요.

‘들려도 모르는 척, 들려도 모르는 척…. 아니지, 지금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 아닐까?’

라비는 모리 엄마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모리가 어딨는지 알아요!”

라비는 모리가 있는 곳으로 모리 엄마를 인도했습니다. 모리는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고 있었죠. 모리는 눈앞에 엄마와 라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잣을 숨기러 돌아다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는군요.

“라비, 하마터면 모리가 위험할 뻔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라비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습니다. 엄마와 다정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모리를 보며 라비는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라비는 다시 예전처럼 숲속의 동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토비의 조언대로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요.



라비가 끙끙거리며 나무 기둥에 판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판에는 ‘돌아가시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지요.

“라비, 한참 찾았잖아. 여기서 뭐해?”
“형, 마침 잘 왔어. 이것 좀 잡고 있어 봐.”

토비는 나무에서 판이 떨어지지 않게 양손으로 붙잡았습니다.

“뭐하는 건데?”
“표지판이라도 세워놓으려고. 여기는 외져서 길을 잘못 들면 위험하잖아.”

토비는 풀을 엮어 만든 끈과 표지판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거 만드느라 아침 일찍 나간 거야?”
“아침에는 느티나무 쉼터에 좀 다녀왔어.”
“그나저나 라비! 너 지금 눈이 너무 빨개. 안 그래도 빨간 눈이 더 빨개졌잖아.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서 쉬어.”
“좀 기다려봐. 이것만 하면 돼.”

라비가 기어이 나무 기둥에 표지판 다는 일을 끝낼 때쯤, 라비와 토비의 귀가 동시에 움찔거렸습니다.

“라비, 지금 이 웃음소리 들려?”
“느티나무 쉼터 같은데? 오늘은 다들 기분이 좋은가 봐.”

라비와 토비는 쉼터 쪽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누군가 버려진 나무 기둥을 잘라 느티나무 쉼터 주변에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았다는군요. 휴식처가 충분하니 동물들은 더 이상 쉼터 사용 문제로 싸울 일이 없겠다면서요.

“라비, 혹시…?”
“쉿! 비밀이야.”

라비는 뻐근한 어깨를 펴며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숲속에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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