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너머의 독주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한낮의 햇살이 거실 바닥을 따뜻하게 데웁니다. 차 한 잔을 들고 거실을 거닐던 린다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발바닥으로 바닥을 문질렀습니다. 소파는 푹신하고, 차는 향긋했습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눈꺼풀이 슬며시 내려온 할머니는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창틈으로 피아노 소리가 새어 들어와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렸습니다. 뚱땅거리는 건반 소리에 할머니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툭툭 끊기던 음이 점점 하나로 이어지며 연주가 시작되자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이것 좀 들어봐. 내가 시끄러워서 정말 ….”

할머니는 수화기를 허공에 대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나기 시작한 건 옆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부터였습니다. 젊은 부부와 대여섯 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한 가족이었지요. 아이 아빠와 아이가 없는 낮에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아이 엄마였습니다. 아이 엄마는 할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평온한 일상을 침범하는 여자가 곱게 보일 리 없는 할머니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시선을 피하곤 했습니다.

사실 린다 할머니는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전에 살던 이웃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온 이웃이 개를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반가웠지요. 이제야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겠다고 내심 기대했는데, 불청객 같은 피아노 소리에 할머니는 이번에도 옆집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글렀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어때, 시끄럽지?”

린다 할머니의 추궁에 친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응? 잘 안 들리는데?”
“다시 잘 들어봐.”
“… 으음, 살짝 들리긴 하네.”
“살짝 들린다고? 얘, 너 귀에 문제 있는 거 아니니? 병원 가서 청력 검사 좀 해봐.”
“그러지 말고 공원으로 나와.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자고.”

할머니는 식은 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습니다.




며칠 뒤, 린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곳곳의 먼지를 털고, 걸레로 깨끗이 닦았지요. 새 방향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본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뒤 주방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볶은 닭이 든 솥에 물과 소스를 부은 다음, 냉장고에서 채소를 꺼내 샐러드를 만들었습니다.

솥 안의 스튜가 보글보글 끓을 무렵, 현관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할머니는 파스타를 뒤적이던 주걱을 급히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향했습니다. 문을 열자 낭랑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얼굴 좀 보자.”

손녀는 할머니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할머니는 볼을 비비는 손녀의 등을 찬찬히 쓰다듬었습니다.

“배고프지? 얼른 점심 먹자. 할머니가 우리 손녀 좋아하는 닭고기 스튜 만들어 놨단다.”

손녀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거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래, 유학 생활은 어떠니?”

할머니는 스튜에서 건져낸 닭 다리를 손녀의 접시에 놓으며 물었습니다. 손녀는 포크로 살점을 뜯어내면서 말했습니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잘 지내요. 음식도 입에 잘 맞고요.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이 최고죠!”

손녀는 살코기를 입에 넣으며 엄지를 치켜들었습니다.

“다행이구나. 네가 어릴 때 드레스 입고 콩쿠르에 나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피아니스트가 될 준비를 하다니. 할머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할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손녀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손녀는 보따리를 풀어내듯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쫑알쫑알 이야기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할머니는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였습니다.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과일을 들고 거실로 향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손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좀 시끄럽지?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어찌나 뚱땅거리는지, 조용할 날이 없단다.”

손녀는 할머니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허공을 응시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놀렸습니다. 마치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요.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손녀의 눈을 보며 물었습니다.

“왜 그러니?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저도 아는 곡이어서요. 입시 준비할 때 연습했어요.”
“그래?”

손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멜로디를 따라 손가락을 위아래로 통통 흔들던 손녀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 부분! 여기가 어려워요. 오른손으로 흑건을 빠르고 정확히 쳐야 하는데, 조금만 주춤하면 소리가 뭉개지면서 바로 티가 나거든요. 손끝에 온몸의 힘을 싣는 기술이 숙달돼 있어야 해요. 이 곡 연습할 때 오른손 약지에 힘주는 게 진짜 힘들었는데….”

양손을 놀리던 손녀는 문득 아무 말 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발견하곤 멋쩍은 듯 슬그머니 팔을 내렸습니다.

“죄송해요. 아는 곡이 나오니까 저 혼자 신났네요.”
“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이 곡, 치기 어렵니?”
“네! 상당히 고난도의 곡이에요. 전공자들한테도 까다롭고요. 근데 잘 치네요. 이 곡이 짧은 데다 엄청 빠르고 화려해서 실력이 바로 드러나거든요. 이런 연주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닌데, 할머니는 공짜로 좋은 연주를 들으시네요?”

할머니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옆집 여자가 아무렇게나 치는 줄 알았는데, 손녀의 말을 들으니 새삼 놀라웠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이번에는 묵직한 곡조가 시작됐습니다. 손녀의 눈빛이 또다시 빛났습니다.

“어? 이 곡은 먼젓번 곡이랑 같은 쇼팽 에튀드 중에 하난데요 ….”

손녀는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할머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피아노 선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예전에 들리던 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손녀는 한동안 담 너머로 들려오는 피아노 독주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토도독토도독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린다 할머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습니다. 스르르 눈꺼풀이 감기자 할머니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띵, 띵.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려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습니다. 이어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는 연주가 거실을 촘촘히 물들였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나 지금 귀 호강 하고 있어. 비도 오고 마음도 적적할 때는 피아노 감상이 최고지. 꼭 우리 손녀가 옆에서 연주해 주는 것 같아. 참 좋아.”

손녀가 다녀간 후부터 할머니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더 이상 언짢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유려하고 강약이 있어 때로는 급격하게 치고 올랐다가 포근하게 감싸주는 선율이 오히려 마음을 울렸지요. 그동안 괜히 짜증을 부렸나 싶어 아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에는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여자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할머니는 머뭇거리다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옆집 여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할머니 눈에는 외모도 단아하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손도 고와 보였습니다. ‘저 손가락에서 그렇게 풍성한 연주가 나온다니.’ 할머니는 새삼 귀하고 대단한 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도 와서 한번 들어 봐. 혼자 듣기 아까워.”

친구와 통화를 마친 린다 할머니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눈을 감자 피아노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빗줄기를 따라 나직나직 스며드는 음률을 감상하던 할머니의 발끝이 살랑살랑 리듬을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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