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빵. 빵빵.
경적 소리가 도로에 요란하게 울려 퍼집니다. 택시 기사인 제프리는 초보 운전으로 보이는 느림보 앞차를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앞차는 아까부터 제프리의 택시를 가로막다시피 서행하고 있었습니다. 경적 소리에 놀란 앞차가 속도를 살짝 높였지만, 제프리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거 참! 아침부터 답답해서, 원.”
제프리는 불만을 쏟아내고는 핸들을 꺾어 앞차를 추월해 달려갔습니다. 제프리는 평소 급정거, 급출발뿐 아니라 끼어들기, 신호 위반을 서슴지 않습니다. 손님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탓에 손님의 몸이 한쪽으로 마구 쏠리기도 하지요. 그래도 제프리는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택시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울 수 있고, 많은 손님을 태우면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으니 오히려 흡족해하지요. 그렇게 일하다 보니 제프리는 무엇이든 빨리빨리 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여느 때처럼 제프리의 가족이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식탁에는 블루베리 베이글, 달걀 스크램블, 소시지가 한 상 차려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벤이 베이글을 집어 들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빠, 어제 유치원 끝나고 에이든 집에 갔어요.”
“그랬니?”
“에이든 집에 멋진 장난감 자동차가 있었는데, 에이든이 일주일 동안 가지고 놀라며 빌려줬어요! 저기 보세요.”
“멋지구나.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저것보다 더 좋은 장난감 사줄게.”
제프리는 벤이 가리키는 장난감을 슬쩍 보고는 남은 소시지를 한입에 넣었습니다. 이번엔 아내 안나가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우리 휴일에….”
언제나처럼 일등으로 식사를 마친 제프리는 안나의 말을 끊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출근해야 하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오늘은 좀 늦을 거요.”
말을 마친 제프리는 겉옷과 차 키를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안나는 가족을 위해 항상 바쁘게 일하는 남편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아빠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벤도 시무룩한 얼굴로 아빠의 빈자리를 쳐다봤습니다.
“벤, 아빠가 다음에 좋은 장난감 사주신대. 그러려고 지금 열심히 일하시는 거야.”
안나는 애써 목소리 톤을 높이며 벤을 토닥여주었습니다.
한편, 마당을 지나 택시가 주차된 곳으로 달려가던 제프리는 이웃집 베티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제프리, 마침 잘 만났네. 나 좀 태워주겠나?”
“좋지요. 짐은 제게 주세요.”
제프리는 할머니의 큼지막한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에 싣고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여행 가시나 보군요. 어디로 가세요?”
“여행이라면 여행이지. 오래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게 됐소. 벨루스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주시오.”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베티 할머니는 몇 년째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가끔 딸들이 찾아와 할머니를 보살펴주곤 했는데, 최근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누군가의 꾸준한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미안해 오늘 요양원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도 체구가 작은 할머니가 전보다 더 야위어 보였습니다.
제프리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속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좀 천천히 가줄 수 있겠소? 마지막일지 모를 이 거리를 최대한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다오.”

제프리는 하는 수 없이 속도를 조금씩 늦췄습니다. 할머니는 이제야 아름다운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며 만족해했습니다. 제프리도 창밖 풍경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키 큰 가로수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습니다. 매일 지나는 거리가 왠지 새롭게 보였습니다.
“저 다리 건너 공원에는 가봤소?”
할머니는 멀리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보며 물었습니다.
“아들이 가자고 몇 번 졸랐는데 아직 못 가봤어요.”
“우리 가족은 자주 갔었다오. 아이들이 어릴 때 공원에서 돗자리 펴고 도시락 먹는 게 행복이었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참 재밌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애들이 다 저기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구려.”
할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택시는 마을을 지나 외곽 도로에 들어섰습니다. 양옆으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며 할머니는 추억의 서랍 속에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우리 가족은 산 타는 걸 좋아했다네. 영감이 제일 앞서 걷고 나랑 아이들이 뒤따라 올라가곤 했지. 한번은 정상을 얼마 안 남기고 둘째 아이가 안 보이더군. 분명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때 심장이 아주 철렁했다네. 그래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는데 산 중턱쯤이었던가, 둘째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더군.”
할머니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던 제프리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아니, 거기서 혼자 뭘 찾았대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글쎄, 네잎클로버를 봤다는 거야. 그만 가자고 해도 네잎클로버를 찾아서 나한테 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거 있지. 귀여운 소동이었네. 그 아이는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정작 우리가 자기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직도 모를 거요.”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택시 안에 퍼졌습니다. 제프리는 아들 벤이 생각났습니다. 벤과 마지막으로 놀아준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벤에게 장난감을 사준 적은 있어도 그걸 가지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던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벤도 아빠와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쉼 없이 달리는 택시처럼 계속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바다를 보니 또 생각나는 일이 있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 생일이었던 것 같소.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자며 영감이 애들과 나를 데리고 바닷가의 레스토랑으로 갔지. 바다까지 가서 밥만 먹고 오기 아쉬워 파도에 발을 담갔다네. 그때 바다에서 본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정말 아름다운 핑크빛이었네. 아주 특별한 생일 선물이었소.”
할머니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제프리는 안나를 생각했습니다. 종일 혼자 벤을 돌보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는 착한 아내. 하지만 제프리는 그런 안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 적도,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베티 할머니의 추억 이야기는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나무를 보면 나무에 얽힌 사연이 나왔고, 새들이 지나가면 거기에 얽힌 사연이 또 나왔습니다. 요양원 입구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이제 도착했어요.”
“자네 덕분에 편하게 왔구먼.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았소. 영감도 먼저 떠나고 아이들도 가정을 꾸리고…. 결국 남는 건 이런 추억뿐이라오.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구려.”
평소라면 목적지까지 진작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제프리는 느긋하게 달려온 그 길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아 즐거웠지요. 제프리는 할머니가 내린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남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가족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니….’
남는 것은 추억뿐이라는 베티 할머니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행복은 물질적인 것보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프리는 더 늦기 전에 안나와 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날 제프리는 일찍 일을 마치고 집으로 운전대를 돌렸습니다. 불현듯 아침에 안나의 말을 끊고 나온 것이 생각나 꽃집에 들러 하얀 수국도 샀습니다. 하얀 수국이 미안함의 의미라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늦을 거라던 제프리가 한낮에 집에 온 것을 보고 안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요. 그런 안나에게 제프리는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당신이랑 벤과 함께하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안나는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제프리의 모습에 서운했던 마음이 싹 풀렸습니다. 안나는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말했습니다.
“아까 말하려다 못했는데요, 다가오는 휴일에 우리 가족 다 같이 공원으로 나들이 가는 거 어때요?”
제프리는 가족과의 추억이 마음 한편에 수놓아질 즐거운 상상을 하며 밝은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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