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로버트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흠흠, 오늘은 손님이 얼마나 오시려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도착한 곳은 바로, 얼마 전에 문을 연 로버트의 세탁소입니다. 로버트는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셔터를 올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사실 로버트의 출근길이 항상 이렇게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전 직장에 다닐 때만 해도,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서류 뭉치를 들여다볼 생각에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거든요. 결국 로버트는 그곳을 나왔고, 이것저것 다른 일에 도전해본 끝에 손재주를 살려 세탁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간 모은 돈으로 마을의 목 좋은 곳에 작은 세탁소를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로버트, 오늘도 일찍 나왔구먼!”
옆집 제과점 주인인 브라운 씨가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을 걸었습니다. 로버트도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참! 조만간 내 작업복을 몇 벌 맡기려는데, 혹시 수선도 되나?”
“그럼요.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장님 옷이니 특별히 신경 써드리지요.”
“에이, 자네 꼼꼼하잖나. 특별히 신경을 써준다니 크게 걱정은 안 하겠네. 하하!”
브라운 씨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로버트도 미소지었습니다. 날씨가 무척 화창했습니다. 로버트가 창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다림질을 하는데, 출입문에 달아놓은 종이 딸랑거렸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 코트, 깨끗하게 좀 해주게.”
로버트가 고개를 들어 보니 은발의 할머니가 보라색 코트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멋스러운 트위드 재킷에 화사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받쳐 입고, 목이며 귀에는 알이 굵은 진주 액세서리가 걸려 있었으니까요. 거기다 반짝이는 구두까지! 로버트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 네! 언제까지 해드릴까요?”
“그리 급하지는 않네. 일주일 후에 오면 충분하겠지?”
할머니는 코트를 건네고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문을 나섰습니다.
‘이 마을에 저런 분도 있었나.’
로버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머니의 코트를 여기저기 살폈습니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코트였습니다. 세탁소를 연 뒤로 처음 접해본 고급 소재였지요.
그날 오후, 잠시 쉴 겸 밖에 나왔다가 브라운 씨와 마주친 로버트는 그 할머니에 대해 물었습니다. 브라운 씨는 로버트의 설명을 듣자마자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누군지 알겠다. 머피 할머니라고, 타고난 멋쟁이에 소문난 마당발이야.”
브라운 씨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 그 할머니가 왜 멋쟁이인 줄 아나? 옷 보는 눈이 그만큼 까다로워서 그래. 어디 옷에만 그런가? 매사에 어찌나 깐깐한지, 우리 제과점 빵도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니까?”
“아, 그래요?”
로버트는 할머니가 맡기고 간 코트를 떠올렸습니다.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머피 할머니의 코트를 세탁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며칠 후, 머피 할머니가 아침 일찍 로버트의 세탁소를 찾았습니다. 로버트는 후다닥 코트를 내왔습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할머니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할머니는 별말 없이 세탁비를 치르고 돌아갔습니다.
“휴, 다행이다.”
로버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까다로운 고객을 만족시켰다는 생각에 자신감마저 샘솟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선글라스를 낀 머피 할머니가 코트를 들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젊은이, 이것 좀 보게. 제대로 세탁한 것 맞나?”
“네? 무슨 문제라도….”
할머니는 코트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로버트가 미처 보지 못한 얼룩이 드러났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세탁해드릴게요.”
“언제까지 가능한가?”
“오늘 바로 해놓겠습니다.”
머피 할머니가 돌아간 뒤, 로버트는 다른 일을 제쳐두고 코트부터 세탁했습니다. 혹시 다른 얼룩이 또 있을까 봐 구석구석 들여다보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그날 저녁, 머피 할머니가 코트를 찾으러 왔습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코트를 감싼 포장을 벗기고 여기저기 살폈습니다.
“음, 확실히 깨끗해졌군. 근데, 옷깃에 달린 털이 좀 뻣뻣해진 것 같네. 연달아 두 번 세탁해서 그런가?”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로버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습니다. 할머니는 로버트를 살짝 흘겨보고는 “뭐, 어쩔 수 없지. 다음엔 더 신경 써주게” 하며 예의 도도한 걸음걸이로 코트를 들고 나갔습니다. 로버트는 그런 할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혼잣말했습니다.
“브라운 씨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 ‘다음’이라고? 차라리 안 오셨으면 좋겠다!”
까다로운 머피 할머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로버트의 바람은 얼마 안 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머피 할머니가 로버트의 세탁소가 집과 가까워 편리하다며 수시로 옷을 맡기러 왔기 때문입니다. 고급 소재의 옷은 물론, 다루기 힘든 장식물이 달린 옷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습니다.
“단추 칠이 약간 벗겨졌네.”
“바지 주름을 좀 더 칼같이 잡아줄 순 없나?”
“구슬 장식이 헐렁해졌어!”
할머니의 각종 불만 제기도 계속됐습니다. 로버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신경 쓰지 않을 부분까지 콕 짚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머피 할머니가 미워질 지경이었습니다.
“로버트, 퇴근 안 하나?”
늦게까지 세탁소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브라운 씨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머피 할머니 블라우스 세탁이 방금에야 끝나서요. 이제 남은 일 해야죠.”
“세상에. 어르신이 자네를 아주 단단히 훈련시키는구먼.”
로버트는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잘 견뎌보게. 자, 끼니도 제때 챙겨 먹고.”
브라운 씨는 샌드위치 하나를 건네며 로버트를 격려했습니다. 브라운 씨가 주고 간 샌드위치는 꿀맛이었습니다. 로버트는 다시 힘을 내서 셔츠 꾸러미를 집어 들었습니다.
머피 할머니가 세탁소를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로버트는 전에는 종잡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불만 사항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할머니가 세탁물을 찾으러 와서 이것저것 잔소리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세탁소에 들러 옷을 찾아가던 머피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로버트, 이 기름 냄새는 어떻게 할 수 없나?”
할머니는 세탁 후 옷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전용 세제 때문에 나는 냄새라서요. 포장을 벗기고 바람 드는 곳에 충분히 걸어두셨다 입으세요.”
“잉, 쯧쯧. 이것만 아니면 백 점짜리인데!”
머피 할머니는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간 뒤, 로버트는 답답한 속을 참지 못하고 브라운 씨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세상에, 하다 하다 세제 냄새까지 걸고넘어지시면 저더러 어쩌라는 걸까요?”
브라운 씨는 로버트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생각해보면 괜찮은 아이디어 같기도 하네. 깨끗해진 옷에서 향기까지 나면 얼마나 좋겠나?”
‘향기’라는 단어가 로버트의 귀에 꽂혔습니다.
“오, 그런 생각은 못 해봤네요.”
“왜, 빵 가게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손님들을 더 끌어들이지 않나. 세탁소에 맡긴 옷에서 기름 냄새 대신 산뜻한 향이 나면 아마 손님들도 무척 좋아할 테고….”
브라운 씨는 신이 나서 자기 생각을 줄줄 풀어놓았습니다. 그 사이 로버트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습니다.
‘옷에 향기가 남게 하려면….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날 이후 로버트는 옷에 세제 냄새가 남지 않게 신경 쓰는 한편, 세탁을 마친 후 뿌릴 향수를 연구했습니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상쾌한 향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옷감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맨 끝에 로버트는 특별한 향수를 발명해냈습니다. 가장 먼저 머피 할머니에게 향기 품은 세탁물을 선보이던 날, 할머니는 무척 흡족해했습니다.
“그래, 이거지.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신경 쓰다니, 자네를 인정 안 할 수가 없구먼. 향이 나니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네!”
뿌듯한 얼굴로 돌아간 머피 할머니는 만나는 지인마다 로버트에 대해 이야기했고, 입소문을 탄 로버트의 세탁소는 새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덕분에 로버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습니다.
“로버트! 점심은 먹고 하나?”
브라운 씨가 제과점 문을 빼꼼 열고 소리쳤습니다. 로버트는 이따 샌드위치를 사러 가겠다고 큰 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러자 브라운 씨는 가게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우유를 챙겨 직접 세탁소로 왔습니다.
“자, 바쁘신 사장님을 위한 배달 서비스! 끼니는 꼭 챙기라니까.”
“에구, 감사해요. 향수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손님이 무척 늘었어요. 다 브라운 씨 덕분이에요.”
“허허허, 그게 어디 내 덕인가.”
브라운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아니라 머피 할머니 덕이지!” 하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로버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알았다는 듯 맞장구를 쳤습니다.
“음… 맞네요. 하하!”
브라운 씨는 고객의 불만을 잘 들으면 자신이 성장하는 법이라며 로버트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로버트가 브라운 씨가 주고 간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무는데,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하게 울렸습니다. 머피 할머니였습니다. 로버트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