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루의 심부름


꼬마 캥거루 아루는 엄마와 호수로 산책을 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입니다. 집까지 아직 멀었는데 아루는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엄마는 아루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보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루를 그루터기에 앉히고 나뭇잎으로 부채질을 해주었습니다.

“와, 시원해요!”
“더 세게 부쳐줄까?”

엄마가 나뭇잎을 더 빠르게 움직이자 아루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까르르 웃었습니다. 아루는 숨도 차고 다리도 아픈데, 엄마는 하나도 힘들지 않나 봅니다. 아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습니다.

“근데 엄마, 저… 주머니에 넣어주시면 안 돼요?”

엄마는 부채질을 멈추며, 많이 힘드냐고 물었습니다. 아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팔짱을 끼고 아루를 살짝 흘겨봤습니다.

“아루, 주머니에는 언제만 들어가기로 했지?”
“위험하거나 급할 때요.”
“그렇지. 지금이 그런 때일까?”
“아뇨, 하지만 다리도 너무 아프고….”

아루는 고개를 떨궜다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시 엄마를 올려다봤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루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서운한 마음에 집에 가는 내내 한숨을 푹푹 쉬었지요.

엄마의 배에 있는 주머니는 새끼 캥거루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입니다. 아루도 태어날 때부터 줄곧 엄마 주머니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갑자기 아루에게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이제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주머니에 넣어주지 않겠다고요. 처음에는 아루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몸집이 자란 후로 주머니가 답답하기도 했거든요. 또 주머니 속에서 지낼 때는 어디든 엄마와 함께 가야만 했는데, 이제 혼자서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으니 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머니 밖의 생활이 불편해졌습니다. 우선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가 사라졌습니다. 오늘처럼 외출할 일이 있으면 걷고 뛰느라 다리가 쿡쿡 쑤셨고요. 게다가 엄마는 아루가 주머니를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웃에게 가서 과일 받아오기, 나뭇가지를 주워서 울타리를 만드는 것까지. 아루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려니 진땀이 나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 엄마와 함께하던 예전이 그리웠습니다. 도와주지는 않고 모든 것을 혼자서 해보라고 말하는 엄마가 내심 야속했지요.

엄마에게 단단히 삐친 아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벌러덩 드러누워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녀석, 정말 피곤했나 보네.”

엄마는 아루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아루가 기지개를 켤 때 멀리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루는 얼른 엄마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기분 좋게 폴짝폴짝 뛰는 아루를 보며, 엄마는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잘 잤니?”
“네, 꿀잠 잤어요.”
“참, 오늘 엄마가 부탁을 하나 할까 하는데.”
“어떤 건데요?”

엄마는 아루에게 건초 다발을 하나 건넸습니다.

“며칠 동안 풀을 모아서 정성껏 말린 거야. 이걸 이모한테 갖다 줄 수 있겠니?”

먹음직스러운 건초를 보고 눈을 반짝이던 아루는 한순간 시무룩해졌습니다.

“어제 엄마랑 지나온 길 기억나지? 그루터기가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이모 집이 금방 나와.”
“아이, 가기 싫은데…. 나중에 엄마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엄마는 아루를 타일렀습니다.

“급한 일인데, 엄마는 나머지 건초를 정리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그래. 도와줄 거지?”

아루는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대답했습니다.

“네. 다녀올게요.”

엄마는 풀을 엮어 만든 끈으로 건초 다발을 묶은 뒤, 배낭처럼 아루의 등에 메어주었습니다. 아루는 엄마에게 꾸벅 인사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에는 산책 나온 캥거루 가족이 많았습니다. 엄마 주머니에 들어가 고개만 쏙 내민 어린 캥거루들도 보였습니다. 아루는 문득 자기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아, 저럴 때가 있었지…. 엄만, 맨날 심부름만 시키고. 혼자 하는 거 싫은데!’

심술이 난 아루는 이를 악물고 마구 뛰었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즈음, 눈앞에 익숙한 그루터기가 보였습니다.

“헉헉, 여기서 쉬었다 가야겠다.”

아루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골랐습니다. 저 멀리 독수리 한 마리가 날고 있었습니다. 아루가 눈으로 독수리를 쫓는데, 독수리가 갑자기 방향을 틀며 비틀거리더니 아루와 멀지 않은 곳에 곤두박질쳤습니다.

“윽! 아프겠다.”

아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습니다. 풀밭에 내리꽂히다시피 한 독수리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걱정된 아루는 살금살금 독수리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꼬마 독수리였습니다.

“저기…, 괜찮아?”
“앗! 여기가 어디지?”

말을 걸자마자 독수리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는 바람에, 아루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깜짝이야! 여기는 유칼립투스 숲이야. 조금만 더 가면 호수고.”
“우아, 나 오늘 꽤 멀리 날았다!”

독수리는 아픈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퍼덕이며 기뻐했습니다. 요즘 한창 비행 연습 중인데, 저 멀리 바위산에서부터 날아왔다고요. 아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혼자 날기엔 너무 위험한 것 아냐? 이렇게 뚝 떨어지기도 하고. 엄마가 안 도와주셔?”
“우리는 원래 어릴 때부터 스스로 나는 연습을 해.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랄까.”

독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깃털을 가다듬고 다시 날아오를 채비를 했습니다.

“엄마랑 약속한 시간까지 돌아가려면 서둘러야겠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또 보자!”
“응, 조심히 가! 또 떨어지지 말고!”

멀어지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아루는 비록 서툴더라도 스스로 날려고 노력하는 독수리가 꽤 늠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보다 잘 나는데? 멋지다!’

아루는 그런 독수리가 부러워, 자기도 용기를 갖고 심부름을 잘 해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루는 어깨를 쭉 펴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흙덩이가 날아왔습니다.

“아야! 어디서 날아온 거지?”

아루는 몸에 묻은 흙을 털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때 수풀 너머에서 또다시 흙덩이가 날아왔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아루는 수풀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풀들을 옆으로 젖히자 조그만 웜뱃이 땅굴을 파고 있었습니다.

“안녕!”

아루의 인사에 웜뱃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지, 얼굴이 흙범벅이었습니다. 아루는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습니다.

“근데 땅굴은 왜 파는 거야?”
“아, 동생들 데려와서 놀려고!”

웜뱃은 동생 둘이 돌아가며 말썽을 피우는 통에 엄마가 쉴 틈이 없다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래서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봐줄까 하고 새 땅굴을 파는 중이라고요. 그러면서도 귀여운 동생들 덕에 집이 복작복작해서 재밌다고 자랑했습니다. 아루는 동생이 있어 좋겠다며, 새로 판 땅굴이 아늑해 보인다고 칭찬했습니다. 웜뱃은 고맙다면서 해맑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넌 어디 가는 길이었어?”
“아, 엄마 심부름. 이건 이모에게 줄 건초야.”
“혼자 심부름이라니, 너야말로 대단하다!”

웜뱃의 말에 아루도 싱긋 웃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졌습니다. 그 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금방 이모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모는 아루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줄로만 알았더니, 그새 많이 자랐구나. 엄마도 잘 도와주고, 기특하네!”
“헤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이모는 아루의 등을 토닥이며 숲에서 나는 싱싱한 채소를 한가득 챙겨주었습니다. 아루는 꾸벅 인사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힘차게 달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들, 벌써 왔어?”

아루의 씩씩한 목소리에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와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루는 이모가 챙겨준 채소를 건네며, 독수리와 웜뱃을 만난 이야기를 조잘조잘 풀어놓았습니다.

“다들 혼자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웜뱃처럼 동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도 앞으로 엄마를 더 많이 도와드릴게요.”

엄마는 아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엄만 말만 들어도 벌써 든든한걸! 그리고 웜뱃은 부러워할 필요 없어.”
“네? 왜요? 저는 동생이 없는데….”

엄마는 말없이 웃으며 주머니를 가리켰습니다.

“헉, 설마!”

아루는 두 팔을 들고 방방 뛰었습니다. 상상도 못 한 소식이었기에 기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아루는 엄마의 주머니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주머니 양보해줄게! 쑥쑥 자라서 얼른 만나자, 동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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