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작은 언덕, 브리즈힐에 아름다운 꽃들이 한가득 피었습니다.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모습을 닮은 팬지, 수줍은 듯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튤립, 여리여리한 꽃잎에 까만 수술을 가진 아네모네, 하나의 꽃대에 깔때기 모양의 꽃들이 풍성하게 달린 히아신스…. 이곳저곳에 무리를 지어 아름답게 핀 꽃들은 형형색색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까지 내뿜습니다. 브리즈힐을 찾는 벌과 나비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행복감을 감추지 못하지요.
이른 아침부터 꿀을 구하러 나선 꿀벌 코비가 꽃 주위를 빙빙 돌며 준비운동을 합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싱그러운 향기에 흠뻑 취한 듯한 표정으로 스트레칭을 하더니, 하얀 데이지를 향해 “윙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습니다.
“여기, 꿀 좀 줘!”
코비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꿀을 담는 양동이를 내밀었습니다. 데이지는 꿀샘을 살짝 열고 새침하게 대꾸했습니다.
“이것밖에 없어.”
“엥, 뭐야? 간에 기별도 안 가겠네.”
“그럼 딴 데 가서 구하든지.”
“아니, 그거라도 줘.”
데이지가 내어준 꿀은 양동이 바닥을 겨우 덮을 정도였습니다.
코비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다른 꽃으로 날아갔습니다. 별꽃에게 다가간 코비는 몸에 묻은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털어내며 생색내듯 말했습니다.
“꽃가루를 충분히 줬으니 꿀도 넉넉히 줘!”
“미안하지만 많이는 줄 수 없어. 이따 나비 친구들에게도 나눠줘야 하거든.”
별꽃도 적은 양의 꿀을 내어주었습니다.
‘쳇, 다들 왜 이리 인색한 거야?’
코비는 이 꽃 저 꽃 부지런히 다니며 꿀을 구했지만 오전 내내 양동이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지쳐서 잠시 쉴 곳을 찾다 동료 레아를 발견했습니다. 레아는 데이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안녕! 그동안 잘 지냈니?”
“오, 어서 와. 상냥한 레아!”
“오늘따라 잎이 더욱 싱싱해 보이는걸. 향기도 더 달콤하게 느껴지고 말야.”
“호호호, 그래?”
“지난번에 준 꿀 정말 잘 먹었어. 오늘도 꿀을 좀 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 좋아.”
“우아, 정말 고마워!”
‘뭐야? 아까 나한테는 꿀이 조금밖에 없다고 해놓고선.’
코비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약이 올랐습니다. 잠시 후, 꿀을 잔뜩 얻은 레아가 웃으며 코비에게 왔습니다. 심기가 불편해진 코비가 따지듯 물었습니다.
“넌 자존심도 없냐?”
“응? 무슨 말이니?”
“꽃에게 꿀을 구할 때 말이야, 왜 그렇게 굽신대? 우리가 이 꽃 저 꽃 다니며 꽃가루를 전해주니까 꽃이 열매도 맺고 씨앗도 남길 수 있는 거잖아. 오히려 꽃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해야지, 계속 그렇게 굽신대면 꽃들이 콧대만 더 높아진다구!”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낸 코비는 레아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떠버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꽃들이 얄밉게만 느껴져, 더 이상 꿀을 구할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해는 중천에 있고 꽃향기가 여전히 코를 간질였지만 코비는 그만 집으로 향했습니다. 등 뒤로 브리즈힐이 멀어져 갔습니다.
“수고했어! 힘들었지?”
“뭐, 그냥….”
“어디 아파?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
“좀 피곤해서 그래.”
양식 창고를 담당하는 동료 비비가 반색하며 코비의 양동이를 받아 들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양동이가 가벼워 내심 민망한 코비는 일부러 더 피곤한 척하며 힘없이 돌아섰습니다. 그러고는 잠을 청하려고 누웠습니다.

얼마 후, 코비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꿀을 구하러 갔던 일벌들이 돌아와 비비에게 꿀을 주었습니다. 레아도 양손에 든 양동이를 비비에게 건넸습니다. 두 양동이엔 꿀이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우아, 레아 넌 어쩜 나갈 때마다 이렇게 많은 꿀을 얻어오니?”
비비의 감탄에 옆에 있던 동료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대단해!”
레아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만나는 꽃마다 마음씨가 좋아서 꿀을 듬뿍 주던걸. 정말 감사하지?”
동료들은 입을 모아 레아를 칭찬했습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코비는 입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렸습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종일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코비는 꼼짝없이 집에 들어앉아 있으려니 따분해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동료들은 집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날갯짓으로 환기도 시키고 보수할 곳을 살피며 일감을 찾느라 분주했습니다.
“도대체 비는 언제까지 오는 거야?”
코비의 푸념 섞인 혼잣말에, 청소 도구를 들고 곁을 지나가던 레아가 멈췄습니다.
“밖에 못 나가서 지루하지? 그래도 비가 와서 그동안 못 했던 일을 할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아? 이런 날을 대비해 열심히 꿀을 모아둔 덕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참에
체력도 보충할 수 있잖아.”
“몰라, 몰라. 암튼 난 비가 그치기만 하면 일등으로 나갈 거야!”
드디어 날이 갰습니다. 온 세상에 햇살이 내리쬐어 화창했습니다. 신이 난 코비는 몸을 흔들며 비행할 준비를 했습니다. 동료들도 집 주위를 붕붕 날아다니면서 몸을 풀었습니다. 준비운동을 마친 코비가 하늘을 마음껏 날며 브리즈힐로 향했습니다. 꽃잎마다 나뭇잎마다 맺힌 물방울이 싱그러움을 더하고, 꽃향기도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퍼졌습니다.
‘오늘은 기필코 양동이를 가득 채워 가야지!’
의욕에 불탄 코비는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떠들썩한 소리가 났습니다. 마을에서 유명한 사고뭉치 꼬마 삼총사였습니다. 학교 가다 말고 브리즈힐로 샌 삼총사는 나무 열매를 함부로 따 먹는가 하면, 꽃잎을 따서 꿀을 빼 먹기도 했습니다. 꽃을 마구 꺾어 던지며 장난도 쳤지요. 막무가내로 식물들을 짓밟는 삼총사를 보며 꿀벌들은 어찌할 줄 몰라 멀찌감치에서 제자리만 맴돌았습니다.
‘아니, 꽃들을 망가뜨리면 꿀을 구할 수가 없잖아!’
화가 난 코비가 참을 수 없어 아이들에게 세찬 기세로 날아갔습니다.

“안 돼! 꽃들을 가만 놔둬!”
코비는 윙윙거리며 삼총사 주위를 빠르게 돌았습니다. 한 아이가 나서서 코비를 쫓아내려 책가방을 이리저리 휘둘렀습니다. 코비는 물러서지 않고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지켜보던 동료들도 힘을 보태기 위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겁을 먹은 두 아이가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했습니다.
“야! 빨리 도망가자!”
책가방을 휘두르던 아이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친구들을 따라 달아났습니다.
“휴….”
한바탕 전쟁을 치른 코비는 기진맥진해져 바위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동료들이 다가와 다친 데는 없는지 물었습니다. 코비는 날개 근육이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 마음을 졸이던 꽃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코비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마워, 코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코비!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꽃들의 감사 인사에 코비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
사실은 꿀 때문이라고 말하려 할 때, 레아가 끼어들었습니다.
“코비, 정말 멋졌어. 네가 꽃들을 그렇게 아끼는 줄 몰랐어!”
코비의 의도와 전혀 다른 상황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코비는 레아의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동안 꽃들을 퉁명하게 대했던 것, 레아에게 심술 맞게 말한 것,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내쫓았을 뿐인데 동료들과 꽃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까지도.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난감해, 코비는 애써 말을 돌렸습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꿀을 구하러 가자구.”
레아가 코비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데이지가 코비를 불러 세웠습니다.
“코비, 저번에 꿀을 많이 주지 못해 미안했어. 오늘은 넉넉히 줄게.”
데이지의 말에 코비는 지난번 일로 토라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습니다. 코비는 못 이기는 척 데이지 쪽으로 가서 슬그머니 양동이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고마워….”
코비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꽃들이 레아에게 왜 꿀을 아낌없이 주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레아가 꽃들에게 늘 상냥한 어투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이유도요.
그날 코비의 양동이는 달콤한 꿀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꽃들이 서로 꿀을 주겠다고 부르는 통에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양동이가 금방 찼습니다. 꽃으로부터 꿀을 얻은 뒤에는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지요. 양손 가득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등 뒤로 멀어져가는 브리즈힐에서도 행복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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