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온이와 말 메아리


다온이는 팔꿈치로 짝꿍을 툭 치며 교과서를 내밀어 보였습니다. 귀퉁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오늘 축구 우리가 이기자’라고 쓰여 있네요.

“정다온, 방금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

선생님의 레이더망에 딱 걸리자 다온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앞을 봤습니다.

“음, 국어 숙제가 없다고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아이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습니다.

“39쪽 숙제는 다온이가 발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수업은 여기서 끝! 모두 식사 맛있게 하렴.”

선생님이 책을 덮자 교실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야, 네 덕분에 발표 걱정 덜었다. 축구공은 구해왔어?”

민재가 싱글싱글 웃으며 다온이 자리로 왔습니다. 다온이는 뒤늦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39쪽을 펼치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아 몰라. 속담을 주제로 글을 쓰라니. 이게 뭐야. 공도 못 빌렸어.”

투덜거리는 다온이 곁으로, 쌍둥이인 지온이가 축구공을 들고 왔습니다.

“얘들아, 공 빌렸어! 찬우가 점심시간에 쓰는 건 괜찮대.”
“뭐라고? 김찬우 나한테는 안 빌려주더니!”

다온이는 당장이라도 쫓아가 따질 기세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지온이는 그런 다온이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민재는 재미있다는 듯 둘을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히히, 다온이는 지온이 없었으면 싸움쟁이 됐을지도 몰라 정말.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점심시간에 2반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기로 했습니다. 자타 공인 3반의 에이스로 통하는 다온이는, 한 골 차이로 졌던 지난주 경기를 곱씹으며 오늘은 꼭 이기고 말겠다고 별렀
습니다.

쌍둥이와 민재는 점심을 후다닥 먹고 밖으로 나와 공을 주고받으며 몸을 풀었습니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양 팀 모두 먼저 골을 넣으려고 분주히 뛰었습니다. 팽팽한 접전 끝에 민재가 공을 잡자, 골대 근처에 있던 다온이가 크게 외쳤습니다.

“이민재! 이쪽이야!”

다온이는 민재의 패스를 받아 골을 시도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재는 패스할 기회를 엿보다가 그만 상대편 아이에게 공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공을 가로챈 아이는 여세를 몰아 다온이네 반 몇 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습니다. 상대편의 환호에 다온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어떻게든 실점을 만회해보려고 부지런히 뛰었지만, 오늘따라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끝났습니다.

“아, 벌써 종이 치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점심시간이 5분 남았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다온이가 한숨을 푹 쉬며 민재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민재! 중요한 순간에 공을 뺏기면 어떡하냐? 우리가 골 넣을 수 있었는데.”

민재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다온이는 계속 투덜거렸습니다. 보다 못한 지온이가 나섰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그만해.”
“이민재 때문에 또 졌잖아, 진짜.”

민재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렇게 잘났으면 남 도움 없이 골 넣지 왜 못 넣었냐?”

민재가 쏘아붙이자 다온이도 지지 않았습니다.

“와, 너 진짜 양심 없다. 왜 나한테 화풀이야?”
“화풀이?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다온이와 민재는 당장이라도 치고받을 것처럼 서로를 노려봤습니다.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큰 싸움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다온이가 겨우 분을 삭이며 수업 준비를 하는데, 친구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 그래도 민재 속상할 텐데, 정다온 너무했다.”
“그러니까. 다음에 이기면 되지.”

다온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습니다.

‘치, 뭐가 심했다는 거야. 내가 틀린 말 했나?’

수업 시간, 다온이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어, 비 오네. 우산 없는데.’

다온이는 교실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민재 자리에 우산이 걸려 있는 게 보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다온이는 잠시 고민하다 민재에게 갔습니다.

“야, 이따가 우산 같이 쓰자.”

민재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이었습니다.

“설마 삐졌냐? 우리끼리 그런 일로….”
“됐어. 그리고 같이 쓸 사람 있거든?”

민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쌩하니 교실을 나갔습니다. 다온이는 민재 뒤통수에 대고 혀를 한껏 내밀어 보이고는 찬우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찬우도 우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업이 모두 끝났을 때 빗줄기는 제법 굵어져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신나게 집으로 뛰어갔겠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다온이는 복도를 최대한 느릿느릿 걸어갔습니다. 그때, 뒤에서 지온이와 민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재야, 미안한데 우산 같이 써도 돼? 다온이는 먼저 갔는지 안 보이네.”
“어? 응, 그래.”

다온이는 저도 모르게 구석에 몸을 숨기고 나란히 걸어가는 둘을 지켜봤습니다.

“기분은 좀 괜찮아? 다온이도 그냥 속상해서 그랬을 거야.”

지온이 말에 민재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와, 쟤네 진짜 너무하다.’

다온이는 씩씩거리며 실내화 가방을 머리에 이고 마구 뛰었습니다. 순식간에 지온이와 민재를 앞질렀지요. 둘은 다온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 다온아! 먼저 간 거 아니었어?”

지온이가 말을 걸었지만, 다온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습니다.



다음 날, 다온이는 지온이에게 말도 안 하고 먼저 집을 나섰습니다. 지온이는 그런 다온이가 무척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럼 39쪽 발표해볼 사람! 참, 다온이가 하기로 했지?”

국어 시간, 선생님 말씀에 다온이는 이마를 쳤습니다.

‘아 맞다, 완전 잊었네.’

다온이는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누가 대신 발표할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할게요!”
“오, 지온이구나. 형제간의 의리가 대단한걸?”

지온이는 다온이를 향해 배시시 웃고는 자신이 써온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저는 말과 관련된 속담을 조사했습니다. 먼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은….”

지온이가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흐뭇하게 말했습니다.

“지온이가 준비를 열심히 해왔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얘들아, 산꼭대기에 올라서 크게 소리치면 뭐가 들려오지?”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메아리요!” 하고 답했습니다.

“그렇지. 메아리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잖아? 사람 사이에도 메아리가 있어. 내가 사납게 말하면 똑같이 사나운 말이 돌아오고, 고운 말을 하면 고운 말을 들을 수 있단다.”
‘치, 저건 세 살배기도 알겠다. 당연한 거 아냐?’

다온이는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제 민재와 말다툼한 게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다온이는 어제 자신이 민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곱씹어보았습니다. 수업이 끝나고도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찬우가 불렀습니다.

“정다온! 너 친구 없냐? 혼자서 뭐해? 나 음악책 좀!”

발끈한 다온이는 ‘너야말로 친구 없어서 나한테 책 빌리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대로 쏘아붙이려던 다온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정말 찬우에게서 들은 말이 그대로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입니다.

“어? 어…. 빌려줄게. 야, 근데 말 좀 예쁘게 해라. 응?”

음악책을 받아든 찬우는 다온이 얼굴을 살피며 뭘 잘못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온이는 그런 거 아니라며 찬우의 등을 떠밀었지요. 자리에 돌아오자 민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재는 쭈뼛거리며 말했습니다.

“어제는 미안했어. 사실 우산 같이 쓸 사람 없었는데, 괜히 거짓말한 거야.”
“나도 미안해. 어제 심한 말 해서.”

다온이는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이게 선생님이 말한 메아리인가, ‘미안해’ 메아리?” 하고 둘러댔습니다. 민재는 그런 다온이를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다온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민재야, 혹시 공 빌려왔어?”
“당연하지. 빨리 가자! 근데 다온이는?”
“내가 다온인데?”

민재는 요즘 다온이와 지온이를 헷갈리는 일이 부쩍 늘었습니다. 다온이 말투가 점점 지온이처럼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우도, 반 친구들도 둘을 구별하기 힘들다고 기분 좋은 투정을 하고 있습니다. 다온이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습니다. 고운 말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거든요.

“오늘은 진짜로 이겨보자! 파이팅!”
“좋아. 3반 파이팅!”

다온이에게서 시작된 응원의 말이 아이들 사이에 메아리처럼 전해집니다. 파란 하늘 아래, 3반 아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머지않아 승리의 함성도 들리겠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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