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브로콜리!

“딩동댕동―.”
야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점심시간이에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엄마가 정성껏 차려놓은 식탁을 뒤로하고 우유만 한 잔 마시고 왔더니 2교시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거 있죠?

급식실 입구 화이트보드에는 그날그날 식단이 적혀 있어요. 어디 보자, 오늘의 식단. 찹쌀밥, 시금치된장국, 훈제오리를 곁들인 야채샐러드, 김치, 구운 김, 소시지 브로콜리 볶음, 사과. 음… 다른 건 다 좋은데 하필이면 브로콜리가 끼어 있네요.

“안녕하세요, 조리사 선생님! 브로콜리는 빼고 주세요.”
“아니, 브로콜리가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데…. 브로콜리가 섭섭해하겠다, 얘.”
“헤헤…. 그 대신 소시지 많이 주세요.”
“다음엔 브로콜리도 한번 도전해보렴.”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환하게 미소 짓는 조리사 선생님께 차마 그 말까지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냥 웃고 말죠. 조리사 선생님도 아마 제 입장이 되면 이해하실 거예요.

저는 브로콜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왜냐고요? 제가 심한 곱슬머리라서 아이들이 브로콜리라 놀리기 때문이에요. 에휴, 세상에 브로콜리만 없었어도 브로콜리라 놀림 받지 않았을 텐데. 아니, 엄마 아빠가 저를 곱슬머리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빠에게 아이들이 놀린다고 하소연했더니, 아빠는 “내 유전자를 닮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아들과 닮아서 너무 행복하단다”라고 하셨어요. 제가 계속 하소연하면 왠지 아빠의 행복을 빼앗는 것 같아서 그 뒤로는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엄마는 제가 어릴 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곱슬머리라서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고 하셨어요.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손으로 제 양쪽 볼을 비비셨죠. 하지만 그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아요.

“야, 브로콜리! 왜 브로콜리 안 먹냐?”

이렇다니까요. 반에서 사고뭉치로 소문난 녀석이에요. 오늘처럼 급식에 브로콜리가 나온 날을 놓칠 녀석이 아니죠. 녀석은 브로콜리가 담긴 자기 식판을 보란 듯이 제 앞으로 쑥 내밀고는 엉덩이를 흔들고 가요. 진짜 약 올라요. 언젠가는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 거예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급식에 브로콜리가 나오는 날이면 밥을 먹을 때 친구들이 키득대는 게 너무 신경 쓰여요. 왠지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밥을 후다닥 먹고 나와버렸죠.

기분도 바꿀 겸 오늘은 미술학원까지 평소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야겠어요. 보통 큰길을 따라 쭉 걸어가는데, 경사진 길로도 갈 수 있거든요. 그쪽으로 가면 다리도 조금 아프고 시간도 더 걸리지만 평평한 길을 계속 걷는 것보다 재미있어서 좋아요.

오르막길 중간쯤에 다른 학교가 있는데, 오늘 운동회를 하나 봐요. 운동장에 만국기가 걸렸고 사람들도 많아요. 시끌벅적한 응원 소리도 들리네요. 아, 솜사탕 파는 아저씨도 있어요. 이번 주 용돈을 안 쓰고 아껴두길 잘했어요.

“아저씨, 솜사탕 하나 주세요.”
“자, 여기 있다.”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솜사탕을 손에 들고 교문을 나오면서 솜사탕을 한 가닥 죽 찢어 입에 넣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제 어깨를 톡톡 쳤어요. 뒤를 돌아보니 그… 글쎄, 브로콜리가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요! 그것도 제 키만 한, ‘슈퍼 빅 자이언트 브로콜리’요. 브로콜리 탈을 쓴 사람이 아니라 진짜 브로콜리요!

“나와 함께 달리지 않을래?”

슈퍼 빅 자이언트 브로콜리가 숨을 헉헉대면서 말까지 해요!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 큰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요.

“지금 운동회에서 지령 달리기를 하는 중이야. 자기와 닮은 사람을 찾아 함께 결승선까지 달려야 하는데, 네 도움이 꼭 필요해.”

다급하고 간절한 부탁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저는 슈퍼 빅 자이언트 브로콜리의 손에 이끌려 운동장 트랙 안으로 들어섰어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박수하며 환호해요. 그런데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네요. 얼굴이 붉어 홍당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인데, 그 친구는 슈퍼 빅 자이언트 홍당무의 손을 잡고 달리고 있어요. 말투와 행동이 느릿느릿 답답해서 고구마라고 불리는 아이는 역시나 슈퍼 빅 자이언트 고구마와 함께 달리고 있고요. 양파 팀, 토마토 팀도 있어요.

결승선까지 운동장 반 바퀴가 남았어요. 더욱 속력을 내는 브로콜리에 맞춰 저도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달리다 보니, 우리가 다른 팀들을 모조리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왔어요!

“와, 1등이다. 일등!”

브로콜리와 저는 너무 기뻐 서로 얼싸안았어요. 눈물까지 찔끔 나는 거 있죠. 브로콜리가 제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어요.

“모두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아니야. 우리 함께 달렸는걸.”
“너를 못 만났다면 지령도 완수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넌 어디서 왔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브로콜리는 신기해하는 저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어요. 채소들의 세계에서 일 년에 한 번 운동회가 열리는데, 별명이 채소인 사람의 눈에는 그 광경이 보이고 특별히 운동회에 참여할 기회까지 주어진다고요. 그러고는 함께 달려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그런 브로콜리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동안 미워하고 싫어했으니까요. 일기장에 세상에서 브로콜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심한 말까지 썼으니, 말 다한 거죠. 브로콜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이에요. 아무래도 사실을 고백하고 사과해야겠어요.

“실은 말이야….”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고 있어.”
“아, 그게….”
“괜찮아, 이해해. 너무 마음 쓰지 마.”

브로콜리는 씩 웃으며 제 어깨를 토닥였어요. 이해심도 많고 배려심도 깊고, 생각보다 괜찮은 채소인 것 같아요. 브로콜리는 저를 교문까지 배웅해주며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새 정이 들었는지 마치 오래된 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에요. 내년에 브로콜리를 정말 다시 만난다면 미안한 마음보다는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고 싶어요. 꼭 그럴 거예요!



“딩동댕동―.”

야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점심시간이에요. 엄마가 정성껏 차려주신 아침을 잔뜩 먹었는데도 3교시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거 있죠? 어디 보자, 오늘의 식단. 현미밥, 콩나물국, 불고기, 깍두기, 브로콜리 어묵 볶음. 파인애플. 음… 좋아, 좋아.

사실, 슈퍼 빅 자이언트 브로콜리를 만난 날 저녁에 엄마에게 브로콜리 반찬을 해달라고 했어요. 엄마가 웬일이냐며 바로 해주셨지요. 아빠도 신기해하며 제가 브로콜리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어요. 그러고는 “역시, 뭐든 잘 먹는 유전자까지 닮았다니까” 하고 행복해하셨어요. 엄마 아빠가 기뻐하시는 모습에 저까지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만들어주신 브로콜리 반찬도 당연히 맛있었고요.

“안녕하세요, 조리사 선생님! 브로콜리 많이 주세요.”
“오, 도전에 성공한 거야?”
“네? 아…. 맞아요!”
“거봐, 도전하니까 되지? 섭섭해하던 브로콜리 마음이 확 풀렸겠는걸?”
“헤헤, 감사합니다.”

식판을 갖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고뭉치 녀석이 또 저를 놀리려는지 다가오고 있어요. 녀석은 제 식판에 있는 브로콜리를 보고 흠칫 놀라다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해요.

“브로콜리가 브로콜리를 먹는다, 우헤헤!”

예전 같았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그냥 웃음만 나올 뿐이에요.

“브로콜리 먹는 게 어때서?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데!”

제가 그전과 달리 약 오른 표정을 짓지 않고 오히려 웃으니까 녀석이 많이 당황스러운가 봐요.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슬쩍 가버리네요. 언젠가는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 같아요. 뭔가 싱겁게 끝난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요.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젓가락으로 제일 먼저 브로콜리를 집어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요.

‘안녕, 브로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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