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 온 아저씨죠?”
브라이언은 자신을 찾아온 소년을 내려다봤습니다.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양 떼를 몰다가 여기 사시는 걸 봤거든요. 저는 윌리예요. 이건 양젖으로 만든 치즈인데요, 저희 할아버지가 가져다드리래요.”
브라이언이 얼떨결에 바구니를 받자, 윌리는 친숙하게 손을 흔들고는 돌아갔습니다.
몇 달 전, 브라이언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도시에 있는 병원의 응급실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그는 삶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려 의사가 됐지만, 정작 돌아오는 건 보람을 느낄 새도 없이 밀려드는 격무였습니다. 게다가 위급한 가족 앞에서 감정이 격해지는 보호자들을 침착하게 상대하는 일은 무엇보다 에너지가 급격히 소모되는 일이었습니다. 열정 넘치던 그였지만 그런 일상을 바쁘게 살다 보니 점점 지쳐갈 수밖에 없었지요.
브라이언은 문득 자신이 진심 없이 기계적으로 환자를 상대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불타오르던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환자를 살리는 보람을 모두 소진해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마치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가 되어 끝없는 고속도로 한복판에 멈춰 선 듯했지요.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고민 끝에 휴직을 신청한 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시골집으로 왔습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언덕에 지어진 집이라 자신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기 제격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골 풍경을 보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던 중이었는데, 윌리가 찾아오면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윌리는 며칠 후 할아버지까지 대동하고 왔습니다.
“윌리 할아비 되는 헨리라고 합니다. 빵을 구웠는데, 좀 가지고 왔습니다. 윌리, 전해드리렴.”
윌리는 미소 띤 얼굴로 브라이언에게 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집을 둘러보던 헨리가 말했습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오래전 이 집에 벤이라는 친구가 살았는데, 혹시 그 친구와 어떤 사이입니까?”
브라이언은 깜짝 놀랐습니다. 벤은 브라이언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헨리는 할아버지의 친구였습니다. 헨리는 벤에게 이렇게 큰 손자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껄껄 웃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윌리와 헨리는 매일같이 브라이언의 집을 찾았습니다. 헨리는 마을 사람들을 데려와 브라이언에게 소개해주기도 했지요.
“난 마을 목장 주인 톰이오. 신선한 우유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마야예요. 작은 카페를 하고 있으니 한번 들르세요.”
“폴이라고 합니다. 정육점을 운영해요. 헨리를 통해 드린 고기는 맛있게 드셨어요?”
브라이언은 얼마 안 되어 대부분의 마을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던 그의 계획은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베푼 친절은 브라이언도 모르는 사이 그의 마음속에 조금씩 쌓이며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2
“아저씨, 안녕하세요!”
언덕 아래 초원에서 양에게 풀을 먹이는 윌리는 브라이언을 볼 때마다 큰 소리로 인사했습니다. 브라이언도 어느새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가 생겼지요. 어느 늦은 오후, 윌리와 헨리가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브라이언은 그들을 맞으며 담요와 따뜻한 차를 내주었습니다. 헨리는 마당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윌리가 한쪽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브라이언은 헨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우린 죽이 잘 맞았지. 혹시 마을 어귀 큰 떡갈나무 아래에 있는 강에 가본 적 있나? 학교가 마치면 거기서 물놀이도 자주 했지. 벤이 결혼해서 도시로 간 후에도 가끔 그 강에서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네.”
“그러셨군요.”
“나이를 먹다 보니 추억도 자꾸 잊히더군. 그런데 자네를 보면 벤과 있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올라. 자네 덕분에 벤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 요즘 기분이 참 좋네.”
“할아버지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좋은걸요.”
“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네. 내일 또 보세나.”
헨리는 윌리를 불렀습니다. 브라이언도 둘을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지요. 그때였습니다.
“억!”
의자에서 일어나던 헨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습니다. 브라이언은 깜짝 놀라 헨리의 어깨를 흔들었습니다.
“헨리? 헨리! 정신 차려 보세요!”
헨리의 얼굴은 파리했고, 호흡은 멈춘 듯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윌리는 턱을 덜덜 떨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브라이언은 침착하게 윌리에게 지시했습니다.
“윌리, 사람들에게 가서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해. 어서!”
윌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언덕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브라이언은 헨리를 반듯이 눕힌 뒤 가슴 정중앙 아래를 빠르게 눌렀습니다. 입으로 숨을 불어 넣기도 했습니다. 순간 헨리의 얼굴이 과거 응급실에서 봤던 심정지 환자와 겹쳐 보였습니다. 브라이언은 이를 악물고 가슴을 계속 눌렀습니다.
“제발…. 헨리, 눈 좀 떠요!”
그 순간 헨리가 숨을 터뜨렸습니다. 얼굴에 핏기가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본 브라이언은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는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헨리를 옆으로 눕혔습니다. 안정적으로 숨을 쉬는 헨리를 보자 브라이언의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습니다. 그는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때마침 윌리와 마을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황급히 달려온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는 브라이언과 편안하게 숨을 고르는 헨리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3
브라이언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빗자루를 내려놓았습니다. 깨끗해진 마당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은 그는 집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식기를 가지런히 놓고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헨리의 퇴원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는 날입니다. 브라이언의 응급처치로 위기를 넘긴 헨리는 얼마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습니다. 헨리가 입원한 동안 마을 사람들은 혼자 있는 윌리를 위해 끼니를 챙겨주고,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남자 어른들은 순번을 정해 헨리의 곁에서 수발을 들기도 했습니다. 브라이언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이웃을 돕는 사람들에게서 가슴 깊이 우러나는 온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브라이언 아저씨!”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브라이언은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윌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지팡이를 짚은 헨리, 톰, 마야 그리고 폴이 있었지요.
“헨리, 퇴원 축하드려요.”
브라이언은 헨리에게 안부를 건네며 사람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고기 수프를 먹었습니다. 가장 늦게 접시를 비운 헨리가 브라이언의 손을 잡았습니다.

“고맙네, 브라이언. 그때 자네가 내 곁에 없었다면 오늘같이 행복한 날은 다시 없었겠지. 정말 고마워.”
브라이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헨리. 당연히 할 일인걸요.”
순간 브라이언은 자신이 한 말에 놀랐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던 때, 그는 자신에게 감사를 전하는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당연한 일을 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로 인해 살아있음을 느끼던 그에게 그 말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었지요. 삶의 회의가 온 뒤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에서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것입니다.
브라이언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공허했던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메워준 마을 사람들처럼, 그 역시 환자들의 아픔을 온정 어린 손길로 보듬어주고픈 의지가 꿈틀거렸습니다.
‘그래, 사랑이야. 지치고 힘든 마음에 필요한 건 사랑이었어.’
그는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연료가 가득한 자동차처럼, 그의 마음도 새 힘으로 가득 채워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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