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화해 신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잠깐,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아, 월요일이지! 시계를 보니 이미 여덟 시가 훌쩍 넘었다. 어쩐지 푹 잔 기분이 들더라니.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뛰쳐나왔다. 엄마는 거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엄마, 안 깨워주면 어떡해요!”
“어머, 이제 일어난 거야? 네 알람 듣고 깨웠더니 일어났다고 했잖아.”

세상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여간 잠꼬대가 말썽이다.

“으앙, 지각하겠다.”

울상이 되어 욕실로 향했다. 씻는 동안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곗바늘을 돌려봤다. 10분 동안 씻고, 5분 동안 머리 말리고, 5분 동안 옷 갈아입고…. 그래도 너무 촉박한데. 아, 1교시가 체육이니, 체육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면 지각은 면하겠다.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베란다로 향했다. 그런데 건조대에 체육복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옷장을 열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일분일초가 급한데 애가 탔다.

“엄마, 체육복 어디 있어요?”
“글쎄, 못 봤는데. 학교에서 안 가져온 건 아니고?”

지난주 금요일에 체육복을 가방에 욱여넣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럴 리가. 혹시 빨래통에는 넣었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짧은 기억 한 토막이 머리를 스쳤다.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에 체육복을 대충 던졌는데 아무래도 빨래통이 아닌 다른 구석진 곳에 떨어졌나 보다. 시치미를 뚝 떼고 투정을 부렸다.

“분명 가져왔는데. 체육복도 없고, 학교는 늦고 이게 뭐야, 정말!”

투덜거리며 방으로 향하는데, 엄마가 탁자에 티스푼을 ‘탁’ 내려놓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리, 중학생 되고부터는 운동화랑 체육복은 알아서 빨기로 약속했잖아. 기억 안 나? 하여튼 엄마는 네 체육복 못 봤어.”

눈꼬리가 올라간 엄마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엄마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엄마는, 아침부터 화를 내시고 그래.’

괜히 눈앞에 보이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결국 지각했다.



“체육복? 안 가져왔는데.”
“오늘 우리 반 체육수업 없어.”

오늘따라 다른 반 친구 중에도 체육복을 가져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체육 시간, 교복 차림은 나뿐이었다. 평소 성격 좋기로 유명한 체육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하긴, 뜀틀 넘기를 한다고 했는데 교복을 입고 오다니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어정쩡하게 서서 친구들이 뜀틀 넘는 걸 지켜보다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은 내일 수업에는 꼭 체육복을 입고 오라고 하셨다.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옆 반 승아였다.

“무슨 일 있어? 기분 되게 안 좋아 보여.”

나는 교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침에 늦잠 잤는데 체육복도 없는 거 있지. 엄마한테 한소리 듣고, 지각하고, 체육 선생님한테 혼나고….”
“에구, 월요일 아침부터 난리였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가 제시간에 깨워만 주셨어도 이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을 텐데.’

생각할수록 엄마가 야속했다. 학교가 끝나고, 바로 집에 가기가 싫어 승아랑 분식집에 갔다.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들어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엄마는 시장에 가셨나 보다. 문득 체육복이 떠올라 베란다로 향했다. 체육복은 몇몇 옷가지와 함께 빨래통에 들어 있었다. 엄마가 베란다에서 찾으신 듯했다.

‘당장 내일 챙겨가려면 지금이라도 빠는 수밖에….’

한숨을 쉬며 때 묻은 체육복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빨래를 대충 마치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으, 숙제도 많은데 왜 이렇게 나른하지?’

늘어지게 하품하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본능적으로 엄마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안방으로, 부엌으로 향했던 소리가 이번엔 내 방 쪽으로 다가왔다. 얼른 책상에 엎드렸다. 엄마가 방문을 열었다.

“아침에 학교는 잘 갔니?”

나는 잠든 척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말없이 다시 방문을 닫았다. 마음이 답답해 일기에라도 하소연할 생각으로 책꽂이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며칠 전 일기가 눈에 띄었다.

「0월 0일. 가족과 ‘화해 신호’ 정하기.」
며칠 전, 국어 숙제로 가족끼리 화해 신호를 정했다. 말 그대로, 다퉜을 때 먼저 사과하고 싶은 쪽이 상대에게 보내는 신호다. 그걸 주제로 짧은 수필을 써야 했기에 일기 내용이 무척 자세했다.


일기는 ‘그런데 화해 신호를 쓸 일이 생길까?’라는 질문으로 끝났다.

‘생겼네, 며칠 만에.’

내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일기장을 덮었다. 문득 지금 엄마에게 커피를 한 잔 타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 신호를 보내면 엄마와의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지 모른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되레 큰소리친 건 나니까, 엄마에게 서운하긴 해도 먼저 사과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의 기분을 살피려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는 손에 마른 미역을 들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화해 신호로 미역국을 끓이시려는 건가?’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역을 쓰레기통에 꾹꾹 눌러 넣는 것이다. 보란 듯이 화해의 싹을 잘라버리다니…. 엄마는 정말 매정한 성격인 게 틀림없다. 다른 의미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엄마, 진짜 너무해요!”

엄마는 내가 갑자기 외치는 바람에 놀랐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유리야, 설마 체육복 때문에 그래? 그거….”

엄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도로 쾅 닫아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엄마랑 화해는 없다. 애꿎은 일기장을 한참 노려보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엎드려버렸다.

“유리야, 얼른 나와!”

멀리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치킨 냄새다. 엄마의 주특기, 양파 소스도 있는 것 같은데. 둘은 같이 먹으면 그야말로 환상이다.

아빠의 계속된 재촉에 밖으로 나왔다.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못 이기는 척 식탁 의자에 앉았다.

“학교에서 많이 피곤했어?”

아빠가 닭 다리를 내 접시에 놓으며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사실 한숨 자고 나니 아까의 원망스러운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대답 없이 뾰로통한 얼굴로 치킨만 먹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빠도 엄마랑 화해할 일 있으세요? 갑자기 웬 치킨?”

아빠는 꼭 화해할 일이 있어야 먹냐며, 오늘은 그냥 생각나서 사 왔다고 했다. 치킨을 사 가겠다고 하니까 엄마가 날 위해 양파 소스도 만들어주신 거란다. 나는 닭 다리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생각해서 소스를 만들어주셨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괜한 자존심에 소스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작게 속삭였다.

“그래, 치킨이 화해 신호였지.”

엄마는, 갑자기 나를 향해 “아, 그래서!” 하고 외쳤다.

“당신,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냉장고 정리하다가 미역을 몽땅 버렸거든. 근데 유리가 엄청 예민하게 반응하더라고. 왜 그랬을까 싶었는데, 화해 신호 때문이구만. 유리는 내가 미역국 끓이기 싫은 줄 알았나 봐요.”

엄마는 화해 신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눈치였다. 의외였다. 나는 그럼 왜 미역을 버렸냐고 했다.

“유통기한이 좀 지났더라고.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버린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애써 표정을 추스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예요. 저는 엄마가 저랑 화해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았어요. 영영 미역국 못 먹는 줄 알았네.”
“아까 얘기했다면 오해를 빨리 풀었을 텐데. 엄마도 네 마음을 너무 몰라줬네. 그냥 피곤한 줄 알았어. 미안해.”

엄마 말에 그간 야속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렇게 바로 사과하실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나다. 잠시 뜸을 들이다 마음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제가 잘못해놓고 엄마 탓하면서 화내서 죄송해요.”

속이 후련했다. 엄마는 양파 소스를 내 앞으로 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체육복을 세탁기에 돌리려고 했는데, 그새 스스로 빨아놔서 대견했다는 말과 함께.

“아 그건, 내일도 체육수업이 있어서요.”

쑥스러운 마음에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엄마 아빠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내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날, 뽀송뽀송하게 마른 체육복을 입고 체육관에 가다 승아를 만났다. 승아는 체육복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향이 좋다며 호들갑이다. 이래 봬도 내가 직접 빨았다며 으스대자 눈을 흘겼다.

“대단한 일 하셨네. 그나저나 너희 반도 화해 신호 정하기 했어? 나 이제 해야 하는데.”
“아, 그거? 진즉 끝났지. 내가 화해 신호 정하는 팁 알려줄까?”

승아가 얼른 알려달라며 눈을 반짝인다. 음, 뭐부터 이야기해주면 좋을까. 우선 생생한 화해 신호 사용 후기부터 들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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