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 빌의 특별한 휴가


가을로 접어들면서 왕궁 정원사들의 손길이 한층 바빠졌습니다. 무사히 겨울을 나고 내년 봄을 맞이하기 위해, 곳곳의 땅을 갈고 알뿌리 식물을 심는 등 매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윽, 아이고 허리야.”

아침부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려 앉아 잡초와 씨름했던 빌이 허리를 짚으며 일어섰습니다.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더니, 몸이 그야말로 천근만근입니다.

“빌, 점심 먹으러 가자!”

멀리서 동료인 찰리가 소리쳤습니다. 빌은 알았다고 크게 대답하고는 찌뿌둥한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에 떠가는 새하얀 뭉게구름, 정오의 햇살을 받아 한층 싱그러운 빛깔을 뽐내는 꽃들이 마치 동화 속 세상처럼 아름답습니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자 분수의 물줄기 사이로 왕궁이 보입니다. 궁에는 임금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깃발이 높게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빌과 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빌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찰리, 저기 조각상 옆 나무 말이야. 누가 손봤는지 알아?”

빌은 나무 모양이 약간 들쭉날쭉한 것 같다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러더니 주변 식물들을 둘러보며 장미에 잔가지가 많다, 얼마 전에 깎은 잔디가 고르지 못하다, 채송화에 물을 너무 많이 줬다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다 괜찮은데? 점심시간만이라도 일 생각 접고 편히 쉬어.”

빌은 찰리의 등쌀에 못 이겨 곧장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정원으로 나오긴 했지만요. 동료들은 “하여간 빈틈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찰리는 요즘 부쩍 피곤해 보이는 빌이 저렇게 쉴 틈 없이 일하다 건강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동료들의 말마따나, 빌은 모든 일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직성이 풀리는 깐깐한 정원사입니다. 자로 잰 듯 단정한 회양목 울타리와 퍼즐처럼 정교하게 배치된 화단, 카펫처럼 고른 잔디밭을 볼 때라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 흠도 빌의 눈에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곧바로 바로잡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했지요.

빌은 먼저 장미를 가지치기한 뒤,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며 꽃들을 돌봤습니다. 혹 벌레 먹은 잎사귀가 있을까 세세히 들여다보느라 언제나처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보기에 거슬렸던 가로수들도 사다리에 올라 꼼꼼히 손질했습니다.

한참 뒤 사다리에서 내려오는데, 욱신거리는 허리를 신경 쓰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조경용 가위와 허리춤에 걸친 집게 등이 땅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


“빌, 괜찮아?”

근처에 있던 찰리가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빌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동료들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산책을 나온 임금님이었습니다. 정원사들은 얼른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임금님은 상황을 살피고는 빌을 걱정하며 잠시 들어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데, 순간 빌의 머리에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스쳤습니다.

“임금님, 저는 괜찮….”

찰리가 빌의 말을 끊고 나섰습니다.

“임금님, 사실 이 친구는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온종일 일했습니다. 많이 피곤할 텐데, 며칠 쉬면서 몸을 돌봤으면 합니다.”

그 말에 동료들도 모두 맞장구를 쳤습니다. 빌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정말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임금님이 인자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동료를 위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먼. 그런 마음으로 일하니 정원도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네.”

임금님은 흡족해하며 그 자리에서 빌에게 휴가를 내렸습니다. 다시 산책에 나선 임금님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찰리가 말했습니다.

“빌, 왕께서 특별 휴가도 주셨으니, 여기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다 와.”

빌은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아 눈만 껌뻑였습니다. 거름도 만들어야 하고, 수선화와 튤립도 심어야 하고, 연꽃 뿌리도 캐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휴가라니요! 하지만 임금님의 분부인 데다, 자신을 걱정하는 동료의 마음을 알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 네가 무슨 일이냐? 한창 바쁠 때 아니니?”

빌이 고향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 주방에서 나왔습니다. 빌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러게 몸도 생각해가면서 일하지!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 휴가까지 주시다니 감사한 일이구나.”

어머니는 기왕 이렇게 된 것,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하라고 빌을 다독였습니다. 그날 저녁, 빌은 어머니와 함께 오랜만에 느긋한 식사를 했습니다. 정원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일은 잠시 잊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지요. 그렇게 마음먹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 눈꺼풀이 무거웠습니다. 빌은 저녁을 먹자마자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빌은 동이 틀 때쯤 눈을 떴습니다. 푹 잔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평소 같으면 서둘러 정원에 갈 준비를 했겠지만, 휴가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더 누워 있기로 했습니다. 빌은 서서히 밝아오는 창문을 등지고 누웠습니다. 반쯤 열린 창으로 신선한 아침 공기가 밀려들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빌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습니다. 벽돌담을 타고 자란 살굿빛 덩굴장미가 눈에 띄었습니다. 왕궁의 붉은 장미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꽃송이들은, 반짝이는 이슬이 맺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담장 아래에는 어머니가 가꾸는 아담한 꽃밭이 길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어울려 심은 여러 종류의 허브와 앙증맞은 들꽃들이 은근한 조화를 이루어 소박한 멋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빌은 꽃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잎사귀가 성한 게 없네. 멀리서 볼 때랑 너무 다른데?”

마당에 나간 빌은 깜짝 놀랐습니다. 달팽이나 나비 애벌레에게 갉아 먹힌 잎들이며, 군데군데 시들해진 꽃잎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은 흠이 있는 잎사귀를 솎아내려고 몸을 수그렸습니다. 하지만 허리가 다시 욱신거리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그날 오후, 어머니는 빌에게 차를 끓여주겠다며 꽃밭으로 갔습니다.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빌은, 허브잎을 몇 장 따서 돌아오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떼어 내야 할 잎사귀들이 많던데요. 시든 꽃들도 있고…. 그냥 두시는 거예요?”
“그래? 내가 보기엔 다 예쁘기만 한걸.”

빌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물론 해충에 시달리거나 병든 꽃이 있으면 곧바로 손봐야지. 하지만 애벌레가 좀 뜯어 먹은 것뿐인걸. 꽃들이 그런 아픔을 견뎌내며 싱그럽게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어머니는 허브차를 빌에게 내밀었습니다. 찻잔 속 잎이 조금 찢어져 있었습니다. 빌은 잠시 망설이다 잔을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차는 무척 향긋했습니다.

“너무 완벽하게 가꿔주려 하면, 오히려 꽃들이 힘들지 않겠니?”

어머니가 농담하듯 말했습니다. 가볍게 한 말이었지만, 빌에게는 어쩐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작은 문제 하나도 태산처럼 여기며 꽃과 나무를 들쑤시고 다녔던 건 아닐까 싶어 뜨끔했기 때문입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차가 진짜 맛있어요!”

빌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괜히 화제를 돌렸습니다. 빌의 말에 어머니는 허브를 키운 보람이 있다며 기뻐했습니다.

집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빌의 몸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허리도 더 이상 쑤시지 않았고, 돌덩이 같던 어깨도 가벼워졌습니다. 빌은 어머니의 집안일을 이것저것 돕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꽃밭을 돌아볼 때도 함께했지요. 어머니는 꽃을 대할 때 흠보다 예쁜 점을 크게 보았습니다. 빌의 생각에는 뽑아내도 될 것 같은 작은 꽃도 아기 대하듯 소중히 다뤘지요. 어머니 앞에서 꽃을 함부로 손질할 수는 없으니, 빌도 같은 시각으로 꽃들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왕궁에서 갈고닦은 실력도 발휘했습니다. 덕분에 꽃밭의 식물들은 갈수록 더 생기가 돌았습니다. 빌의 마음도 보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빌은 건강을 회복해 왕궁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를 지나 정원에 들어서자, 늘 보아왔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평소 같으면 정원 곳곳을 꼼꼼히 살피느라 몇 걸음마다 멈춰 섰겠지만 이제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게 자라는 모든 꽃과 나무가 사랑스럽게만 보였으니까요.

빌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찰리와 동료들에게 달려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못 보던 사이에 정원이 훨씬 아름다워졌다는 칭찬도 덧붙였습니다. 며칠 만에 돌아온 빌에게 이것저것 지적받을까 내심 걱정했던 동료들은, 그 말에 놀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빌, 무사히 돌아왔구나! 임금님께 인사는 드렸어?”
“아직. 누구 덕분에 얻은 휴가인데, 혼자 인사드리러 갈 수는 없지! 같이 뵙고 오자, 찰리.”

빌의 말에 찰리는 이번엔 자신이 휴가를 갈 차례인 거냐며 웃었습니다. 그러고는 흔쾌히 빌을 따라 나섰습니다. 정원을 가로질러 임금님께 가는 길, 두 정원사의 걸음마다 이야기꽃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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