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바다,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이 유난히 파란 아침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세안을 마친 배씨 할아버지는 마당에 나와 기지개를 쭉 켰습니다. 그러고는 으레 하던 것처럼 마당을 한 바퀴 돌며 곳곳을 살폈습니다. 매년 달콤한 열매를 선물하는 비파나무부터 가지와 호박, 무화과까지 각종 작물이 자라는 마당은 할아버지에게 보물 창고와 다름없습니다. 도시에 있는 삼 남매에게 챙겨줄 먹거리가 풍성하니까요.
시장함을 느낀 할아버지는 잘 익은 가지 몇 개를 따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따끈한 가지볶음을 만들고 열무김치를 꺼내 아침을 뚝딱 차려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데, 안방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의 물기를 대강 털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옆집에 사는 감씨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냥 오지 뭣 하러 전화했어. 아, 낚시 가자고? 좋지!”
감씨 할아버지는 배씨 할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입니다. 오래전 아내를 여읜 데다 자식들이 모두 도시에 나가 살아 만나기 어려운 처지가 배씨 할아버지와 똑 닮았습니다. 두 할아버지는 농사도 서로 돕고, 적적할 때면 밤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이웃이자 친구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할아버지의 성이 배씨와 감씨인 것을 두고 ‘과일 형제’라며 종종 우스개를 하곤 하지요.
단출한 낚시용품을 챙겨 밖으로 나서자 감씨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반겼습니다. 두 할아버지는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손에 양동이를 든 채 바닷가를 향해 나란히 걸었습니다.
“아침 시원할 때 밭에 가야 하는데 낚시라니. 순 자네 때문이야.”
“때문이 아니고 덕분이지! 이런 날은 낚시가 먼저야.”
티격태격하는 것 같지만, 두 할아버지 모두 얼굴에 웃음기가 잔뜩 어렸습니다. 부둣가에 도착해 낚싯대를 드리우자 감씨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송이네가 조만간 여기로 이사 온대. 거, 야트막한 언덕에 빈집 하나 있잖아? 보수해서 민박집 차린다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배씨 할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자네 딸이? 손주 학교는 어쩌고. 아, 아직 한참 어리지!”
배씨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가까이 살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날 오후, 낚시를 마친 두 할아버지는 빈집에 잠시 들렀습니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이라 다행히 크게 손볼 곳은 없었습니다.
“어휴, 이사는 딸애가 하는데, 같이 살 생각을 하니 내가 마음이 더 두근두근하네.”
감씨 할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배씨 할아버지도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감씨 할아버지 딸네가 이사 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선착장에 나가 있던 감씨 할아버지는 얼마 안 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자네, 나와보게!”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배씨 할아버지는 얼른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감씨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서 있었습니다. 그 뒤로 할아버지의 딸과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습니다.
“아이고, 왔구먼.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배씨 할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온 것 같은 반가움에 밝게 인사했습니다. 이삿짐 정리하는 데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물으니, 나중에 집들이 겸 식사하러 오시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저녁, 배씨 할아버지는 갖은 농수산물을 양손 가득 챙겨 들고 집들이에 갔습니다. 말끔히 정리된 집 안에는 가구며 살림살이가 보기 좋게 배치돼 있었습니다. 차려진 음식도 한결같이 감칠맛이 났습니다. 배씨 할아버지는 감씨 할아버지 딸에게 이 정도 음식 솜씨면 식당을 차려도 대성하겠다며 칭찬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밤이 깊었습니다. 피곤한지 잠시 칭얼대던 손자는 조곤조곤 어르는 할아버지의 자장가에 곤히 잠들었습니다. 손자를 품에 안은 감씨 할아버지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습니다. 배씨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돌아가는 길, 하늘에 총총히 뜬 별을 보며 배씨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손녀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하율이는 이제 유치원에 다니려나? 얼굴 못 본 지가 한참이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집에 다다랐습니다. 따뜻한 불빛 아래 소박한 대화가 오가는 곳에 있다가 어둡고 텅 빈 집에 오니 쓸쓸함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바람에 흔들리는 비파나무를 어루만지며 생각했습니다.
‘올해는 애들이 오려나? 오면 잘 익은 비파 맛 좀 보여줘야지. 매실도 좀 챙겨주고….’
그날 밤, 할아버지는 자식들 생각에 한동안 뒤척이다 잠들었습니다.
민박집이 문을 열자 감씨 할아버지는 틈틈이 딸네 살림을 거드느라 분주했습니다. 딸 내외가 모두 바쁠 때는 손자도 돌봤지요. 그럴수록 배씨 할아버지의 적적함은 깊어만 갔습니다. 하루는 배씨 할아버지가 빌린 농기구를 주러 감씨 할아버지네에 들렀습니다. 마침 감씨 할아버지는 딸네와 이른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같이 밥 한술 뜨고 가라는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배씨 할아버지는, 망설이다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다이얼이 한참 울린 후에야 누군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큰아들이었습니다.
“어, 첫째야. 별일은 없고? 나야 잘 지내지. 올해는 휴가 때 내려오는가 해서.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는 배씨 할아버지의 두 어깨가 수화기와 함께 내려앉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생각이 난 김에 둘째 딸과 막내아들에게도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들 많이 바쁜지, 죄송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음에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애들이 바쁘고 일이 잘되면 좋은 거지, 뭐.’
배씨 할아버지는 괜히 힘주어 혼잣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상념을 털어내려는 듯 빗자루로 마당 구석구석을 쓸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노랫말이나 흥얼거리면서요.

한편, 전화를 끊은 배씨 할아버지의 큰아들은 마음이 영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시는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일이지?’
그때, 바로 밑 동생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휴가 때 고향에 내려올 거냐고 물으셨다고요. 막내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삼 남매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다 퇴근길에 잠깐 만나기로 했습니다.
늦은 저녁, 작은 카페에 삼 남매가 모처럼 모였습니다.
“아버지가 많이 적적하신가 보더라. 하긴 찾아뵌 지가 오래되긴 했지. 오빠, 이번에 내려갈 수 있어?”
“수주한 물량을 납품일까지 맞추느라 요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서…. 잘 모르겠네.”
둘째의 말에 큰아들이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시간이 안 나기는 둘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도 월간지 마감하느라 정신없어. 막내 너라도 내려가봐야 하는 거 아냐?”
“자격증 시험이 코앞이라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은데…. 어쩌지?”
셋은 누가 아버지를 뵈러 고향에 갈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이 결국 매듭을 지었습니다.
“각자 최대한 일정 맞춰보고, 정 어려우면 선물이라도 든든히 보내드리자.”
“그래, 연락해. 너도 시험 준비 잘하고.”
“응, 다들 파이팅!”
삼 남매는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두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얼마 후,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섬마을이 북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육지와 섬을 오가는 배에서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관광객과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감씨 할아버지네 식구들은 바빠졌습니다. 배씨 할아버지도 이웃사촌으로서 종종 일을 도왔습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적적할 틈이 없어 좋기도 했습니다.
밭일로 시작해 민박집 일까지 알찬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배씨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당에 널어두었던 빨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데다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웬 도둑인가 싶어 살금살금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 하율이 아니냐?”
훌쩍 큰 손녀가 달려와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했습니다. 며느리는 빨래를 개고 있었고, 큰아들은 어판장에서 사 온 횟감을 손질하며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오셨어요? 이이가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해서 내려왔어요.”
“아버지, 올해 휴가는 아버지 댁에서 나도 되죠?”
배씨 할아버지는 꿈인가 싶어 눈만 껌뻑였습니다. 그때, 큰아들이 조리기구를 찾으며 주방에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할아버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아들과 함께 저녁 준비에 나섰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요리였지요. 부자가 합심한 저녁상이 다 차려질 즈음,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현관문이 열렸습니다. 둘째 딸과 막내였습니다. 둘은 큰아들네 가족을 보고 놀라 어떻게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는 너희는 어떻게 왔냐”는 할아버지의 말에, 둘은 아버지 뵙는 일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아빠, 놀랐지? 갑자기 나타나면 더 반가울 것 같아서 연락 안 했어요.”
딸의 애교에 할아버지는 행복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온 식구가 다 모이니까 집이 좁아서 어쩌나. 우리 손녀가 다 커서 집이 좁네!”
“아버지, 아까 감씨 할아버지 만났는데 저녁에 방 하나 빈대요. 하율이 데리고 그 집으로 갈까요?”
“아서라, 농으로 한 말이지. 하나도 안 좁다.”
황급히 말을 돌리는 할아버지 때문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둘째가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송이가 벌써 아기 엄마가 됐더라고요. 아기가 진짜 귀엽던데.”
“말도 마라. 제 할아비한테 얼마나 재롱을 부리는지….”
“아버지, 감씨 할아버지 질투하시는 거예요? 듣는 하율이 섭섭하겠어요.”
막내아들의 말에 할아버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질투는, 나는 누가 뭐래도 우리 하율이가 제일 좋다.”
오랜만에 배씨 할아버지의 집이 시끌벅적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반가움과 기쁨도 배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각자 품고 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사이,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달빛에 반짝이는 마당의 식물들이 여느 때보다 싱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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