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쪽지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평일 오후. 적막함마저 감도는 도서관에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나른함에 기지개를 켜던 디아나는 놀라서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가자 아니나 다를까, 주디가 쏟아진 책들을 주섬주섬 북트럭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디아나는 쪼그려 앉아 책 줍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저 혼자 할게요.”
“북트럭에 책이 이렇게 한가득이니 쏟아졌지요. 적당히 쌓였을 때 정리하라고 몇 번 말한 것 같은데….”

주디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디아나의 손에서 책을 받아 엉뚱한 자리에 꽂았습니다. 디아나는 주디가 옆 칸으로 간 사이 한숨을 쉬며 그 책을 빼서 올바른 자리로 옮겼습니다.

주디는 신입 사서입니다. 워낙 덤벙거려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습니다. 디아나는 그런 주디가 답답해 잔소리도 해보고, 좋게 타일러도 봤습니다. 하지만 주디는 배시시 웃으며 넘어갈 뿐 좀체 달라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디아나까지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신입이고 나이가 어리다지만, 조심성이 너무 없어. 도대체 어떻게 사서가 된 걸까?’

디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신청 도서 접수를 오늘까지요?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디아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내일 있을 문화 행사 준비로 바쁜데 해야 할 일이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주디가 책 정리를 빨리 마치고 도와주면 좋겠지만,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아나는 결국 혼자 늦게까지 일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들어가 침대에 드러눕자, ‘똑똑’ 하고 언니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디아나와 언니는 도시에 직장을 얻어 부모님과 떨어져 둘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녁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토스트 해줄까?”
“됐어.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안 된 기분이야.”

괜찮냐는 언니의 걱정 섞인 물음에 디아나는 짜증을 부리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언니는 마지못해 알았다며 나가려다 방을 휘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창가에서 시들어가는 화분, 충전기를 잃고 팽개쳐진 노트북과 필기구가 어지럽게 놓여 있는 책상, 이리저리 쌓여 있는 옷가지들….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습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아니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언니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디아나는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습니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아뿔싸, 일어나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언니는, 좀 깨워주지!”

디아나는 부리나케 욕실로 달려갔습니다. 순식간에 씻고 나와 옷장을 열었는데 이번엔 입으려 했던 옷이 없습니다.

“아, 빨래 안 했지.”

디아나는 탄식하듯 혼잣말한 뒤 철 지난 셔츠를 끄집어냈습니다. 잔뜩 구겨진 게 마치 지금 자신의 기분 같습니다. 디아나는 거울을 보며 대충 옷매무시를 정리하고는 여기저기 꺼내놓은 물건들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가쁜 숨을 고르며 도서관에 들어선 디아나에게 주디가 해맑게 인사했습니다. 시큰둥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던 디아나는 주디의 손에서 못 보던 책을 발견했습니다. 시선을 느낀 주디가 생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 신착 도서예요. 좀 많길래 제가 미리 분류 좀 하려고요.”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했지만, 다행히 이후의 일들은 술술 풀렸습니다. 예정됐던 문화 행사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디아나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일을 마친 주디가 도서관을 나설 때도 밝게 인사해주었지요. 잠시 뒤 디아나도 가방을 메고 나가려는데, 위층에서 일하는 동료가 내려와 다급히 말했습니다.

“디아나, 이번에 새로 온 책들 확인해봤어요?”
“주디가 오전 내내 정리하던데요.”

동료는 심각한 얼굴로 서류 파일을 건넸습니다. 디아나는 파일을 펼쳤습니다.

“당월 도서 구입 목록. 우리 도서관은 이번에 외국 서적만 주문했군요. 잠깐, 설마?”

디아나는 주디가 책을 정리하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시집, 자기계발서, 소설책…. 기억을 더듬어도 외국어로 된 책은 없었습니다. 동료는 내일 오전에 다른 도서관에 보내기로 한 책들이 있다며, 아무래도 주디가 그걸 정리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디아나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럼, 주디가 정리한 책들을 도로 꺼내야 하는 거죠?”

동료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디아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책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습니다. 동료는 자기 일이 끝나면 도와주겠다며 나갔습니다. 디아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다, 메모지와 펜을 꺼냈습니다.

『주디, 새로 온 도서가 적어도 어느 도서관 것인지는 확인하는 게 기본 아닌가요? 몽땅 꺼내서 도로 정리하게 생겼네요. 이번 기회에 본인 모습을 한번 돌아봤으면 해요. 물건이나 책 잃어버리는 건 다반사에, 일상적인 업무도 내내 미루다 허둥지둥하고…. 내가 언제까지 수습해줘야 하는 거죠?』


디아나는 쏘아붙이듯 휘갈겨 쓴 쪽지를 주디의 컴퓨터 모니터에 붙였습니다. 그 뒤 한참을 책과 씨름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지요.



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디아나는 허기가 져 무작정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보였습니다. 디아나는 샌드위치와 주스를 꺼내 식탁으로 향했습니다. 식탁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디아나, 아침에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더니, 다행히 출근은 제때 했나 봐? 조깅하고 오니까 가고 없더라. 난 내일까지 쉬니까 친구랑 밤바다 좀 보고 올게. 샌드위치 만들어놨으니 저녁이랑 아침 거르지 말고, 또 늦잠 자지 않게 일찍 자.』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생생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샌드위치를 한입 물고 방으로 간 디아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에 팽개쳐둔 이부자리와 옷,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고, 어지럽던 책상도 말끔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라졌던 노트북 충전기가 돌아왔고, 건조대에는 빨래도 널려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건 어디서 찾은 거야? 빨래는 또 언제 했담.”

직장 일에 치여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안일을 미루다 보니 언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금쪽같은 휴가에 잔뜩 쌓인 집안일을 해주다니,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언니의 꼼꼼한 손길이 마음에 응어리졌던 답답함과 분노까지 싹 정리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엉망인 방을 혼자 쓸고 닦았을 언니 생각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몰려왔습니다.

“언니도 참. 맨날 챙겨주기만 하고 말이야.”

디아나는 언니의 쪽지를 다이어리 사이에 곱게 끼웠습니다. 문득 주디에게 남기고 온 쪽지가 떠올랐습니다.

‘주디한테 너무 심했나? 아직 신입이라 실수할 수도 있는데….’

디아나는 괜히 민망스러워 내일 일찍 출근해 쪽지를 떼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디아나는 평소보다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디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디아나를 발견한 주디는 풀 죽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어제 저 때문에 늦게까지 일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확인을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아, 주디. 그 쪽지 내가….”
“아무래도 전 사서로서 자격이 없나 봐요.”

주디는 울상이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디아나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괜찮아요, 주디. 내가 말을 너무 거칠게 했죠? 나야말로 미안해요.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더 잘 챙겨줘야 했는데 내게도 책임이 있어요. 앞으로 같이 노력해봐요.”

그 말에 주디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그러고는 고맙다며 와락 디아나를 끌어안았습니다. 디아나는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주디의 크고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디아나는 잔소리 대신 따뜻한 말로 감싸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디도 디아나의 충고를 귀담아듣고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퇴근 시간도 평소보다 빨라졌습니다. 디아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섰습니다. 어제 언니가 방 청소와 빨래를 대신 해줬으니 보답으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사실 언니에게 진짜 보답하고 싶은 건, 언니의 친절과 배려로 주디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가게에 들러 언니가 좋아하는 봉골레 파스타 재료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원한 저녁 바람이 얼굴을 간질입니다. 맛있는 식사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고 디아나는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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