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사로운 햇살이 비취는 싱그러운 숲속에 동물들이 사이좋게 모여 사는 행복 마을이 있습니다. 여러 동물이 오순도순 어울려 살아가는 데는 마을 사무소의 공이 큽니다. 사무소에서 일하는 동물들이 마을 곳곳의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주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행복 마을 사무소에 동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새끼에게 예방접종을 시키러 온 엄마 종달새부터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으러 온 두더지 아저씨, 에어로빅 수업을 신청하려는 원숭이 아주머니까지, 다양한 동물들이 접수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원처리 조항엔 집 천장까지 수리해준다는 내용은 없어요. 잘 알아보고 오셔야죠!”
조용한 사무소 안, 누군가 느닷없이 언성을 높입니다. 얼마 전 우수한 성적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새내기 직원, 여우입니다. 동물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여우에게 쏠렸습니다. 여우에게 민원 상담을 하던 산양은 동그랗게 말린 뿔을 긁적이며 눈치를 보았습니다.
“아, 네…. 그런데 구멍은 당장이라도 좀 메워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물어보려고….”
여우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더니 쪽지에 무언가를 휘갈겨 산양에게 내밀었습니다.
“목수인 딱따구리 씨 연락처예요. 따로 문의해보세요.”
“아, 목수요? 저, 근데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희 집은요….”
“이만 가주세요. 할 일이 넘쳐요.”
여우는 개의치 않고 산양의 말을 자르고는 “다음 분!” 하고 외쳤습니다. 산양은 마지못해 힘없이 돌아서서 사무소를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무소장 올빼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우는 걸핏하면 지식을 뽐내며 상대에게 면박을 주어서 마을 동물들이 대하기 어려워했습니다. 보다 못한 올빼미가 무언가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입을 삐죽 내밀고 토라지기 일쑤였지요. 어떻게 하면 여우를 가르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올빼미는 여우의 선배인 반달곰을 불렀습니다.
“아, 내일부터 여우를 옆에 두고 일하게. 그 부탁을 하려고 불렀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올빼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반달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날, 여우는 자신의 책상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당장 올빼미를 찾아갔습니다. 올빼미는 반달곰의 자리에 있는 간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 오늘부터 사흘 동안 선배하고 같이 일하게나. 그리고 이거.”
올빼미는 여우에게 공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배움 공책’. 이게 뭐죠?”
“반달곰이 일하는 걸 보면서 배울 점을 적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이상 여기서 일할 수 없네.”
여우가 무어라 따지려고 했지만 올빼미는 이미 나간 후였습니다. 여우는 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반달곰은 어느새 책상에 앉아 사무소에 찾아온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맨날 나만 갖고 그래. 그리고 반달곰한테 배울 점이 뭐가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는 없기에, 여우는 애꿎은 공책을 구기며 반달곰의 일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우가 몇 시간 동안 관찰해보니 반달곰은 동물들의 민원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상냥하게 대처할 뿐이었지요.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집 천장에 난 구멍을 수리하고 싶은데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여우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왔던 산양이었습니다. 산양도 여우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내 반달곰을 보며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제가 동굴에 사는데, 워낙 오래돼서 천장이 조금 무너졌어요. 수리만 하면 될지, 다른 조치를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섭기도 하고요.”
“그랬군요.”
둘의 대화를 듣던 여우는 귀가 새빨개졌습니다. 산양의 말을 자르며 막무가내로 딱따구리의 연락처를 주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동굴이 무너졌는데 목수를 찾아가라고 했으니,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반달곰은 산양을 위로하며 직접 동굴에 찾아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산양은 거듭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여우는 무언가 깨달은 듯 공책에 적었습니다.
[1.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
“헉헉….”
그날 오후, 여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반달곰과 함께 산을 올랐습니다. 반달곰은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우의 손에 꼭 쥔 공책이 땀으로 젖어 들 때쯤, 자그마한 동굴이 보였습니다. 산양은 반달곰과 여우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동굴에 난 구멍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꼼꼼히 현장을 살핀 반달곰은 서둘러 이동할 채비를 했습니다.
“선배님, 또 어딜 가는 거예요. 안 지치세요?”
“산양은 오늘도 불안한 마음으로 밤새울 거예요. 언제까지 위험한 집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죠.”
반달곰은 산양에게 임시 거처를 지어주기 위해 우선 비버를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우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공책을 펼쳐 후들거리는 손으로 적었습니다.
[2. 다른 동물의 처지를 생각하며, 힘들어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여우는 가파른 산길을 내려갈 생각에 벌써 눈앞이 캄캄했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섰습니다. 둘은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 비버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반달곰은 비버에게 튼튼한 목재를 부탁했고, 사정을 들은 비버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여우와 반달곰이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별이 총총 뜬 한밤중이었습니다. 녹초가 된 여우는 도저히 집에 갈 기운이 없어 대기용 소파에 드러누웠습니다. 온몸이 쿡쿡 쑤셨고, 땀이 마르면서 으슬으슬해졌습니다. 반달곰은 그런 여우를 위해 난로에 불을 지펴주었습니다. 일렁이는 따뜻한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우가 입을 뗐습니다.

“저기… 솔직히 저는, 동물들이 무작정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면 답답해서 화부터 나요. 그런데 선배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일하시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반달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이것저것 따지듯 물어볼 때는 괜히 억울하기도 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를 믿고 찾아와준 동물들한테 고마움을 느꼈어요. 그런 만큼 책임감도 커지고, 상대방의 입장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덕분에 지금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여우는 반달곰의 말을 곱씹어보았습니다. 자신은 동물들을 이해해보려고 한 적도, 큰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여우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배움 공책을 펼쳤습니다.
[3.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올빼미의 말처럼, 반달곰은 배울 점이 참 많은 선배였습니다. 여우는 배움 공책에 이것저것 적다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도 여우는 반달곰 옆에 딱 붙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시종일관 꽁했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는 점입니다. 여우는 반달곰을 찾아온 동물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물론, 옆에서 대화를 듣고 맞장구도 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배움 공책을 펼치는 손길도 한층 바빠졌지요. 올빼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점심 때쯤, 비버가 반달곰이 부탁한 목재를 싣고 찾아왔습니다. 반달곰과 여우는 딱따구리와 함께 다시 한번 산양을 찾아가 당분간 머물 튼튼한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산양은 자신을 돕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 동물들에게 고마워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여우에게 지난번 일에 대한 사과까지 받고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지요. 여우도 뿌듯한지 볼이 발그레해졌습니다.
공사를 마치고 사무소로 돌아오자, 올빼미가 여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반달곰하고 같이 일할 만한가?”
여우는 대답 대신 배움 공책을 내밀었습니다. 올빼미는 공책을 쓱 훑어보았습니다. 공책에는 그간 여우가 깨달은 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반달곰이 몸집만 큰 줄 알았는데, 마음도 넓고 깊은 선배였어요. 보고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여우의 말에 올빼미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겠어. 자네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게.”
눈이 휘둥그레진 여우는 정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올빼미는 웃으며 원래 여우가 일하던 자리를 가리켰습니다. 치워졌던 여우의 책상이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반달곰도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었습니다.
아침부터 행복 마을 사무소가 북적입니다. 두꺼운 민원규정집을 열심히 뒤적이는 여우 앞에 근심스러운 표정의 토끼 부부가 서 있습니다. 여우는 “찾았다!”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다자녀가구 지원정책 4조 5항. 자녀가 다섯 이상이면 일손 지원이 이뤄지네요. 댁에 자녀가 총 몇이라고 하셨죠?”
“모두 여덟이에요. 이번에 세쌍둥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그러셨군요. 아이 셋부터는 육아 도우미도 지원되거든요. 가족사랑부서의 사슴 직원에게 문의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아빠 토끼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지요. 여우는 토끼 부부에게 육아 도우미 신청 서류를 꼼꼼히 챙겨주었습니다.
수북이 쌓인 서류, 닳아서 책 모서리가 부푼 민원규정집들…. 그 가운데 낡은 공책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우가 틈만 나면 들여다보는 보물 1호, 배움 공책입니다.
“어디 보자, ‘다른 동물의 처지를 생각하며 힘들어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래, 남은 하루도 힘내자!”
여우는 공책에 적힌 글귀를 읊조리다 고개를 들고 외쳤습니다.
“다음 분, 이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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