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는 왕자님


초록빛 풀숲 사이로 살랑이던 바람이 잦아든 나른한 오후. 개구리 연두가 연잎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때, 두 개구리가 연잎 사이로 “첨벙!” 뛰어들었습니다. 졸지에 물을 뒤집어쓴 연두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연두야, 우리 왔어!”

건너편 숲에 사는 초롱이와 폴짝이가 물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습니다. 폴짝이는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연두가 앉은 연잎을 흔들었습니다.

“우리 기다리다 잠들었구나!”
“으음, 잠깐 사이에 재밌는 꿈을 꿨는데.”

연두가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초롱이가 꿈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갑자기 깨서 잊어버렸어.”
“그럼 내가 꿈같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폴짝이의 말에, 연두와 초롱이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폴짝이는 무언가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습니다.

“옛날에 글쎄, 왕자로 변한 개구리가 있었대!”

그렇게 운을 뗀 폴짝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냈습니다. 옛날 옛적, 한 왕자가 개구리로 변했다가 공주님의 황금 공을 주워준 뒤 근사한 모습을 되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나 생생하게 말하는지, 연두와 초롱이는 개구리 왕자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굉장하다. 왕자가 되면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초롱이가 입맛을 다셨습니다. 폴짝이는 “초롱이가 왕자가 아니라 돼지로 변하겠다”며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발끈한 초롱이가 폴짝이와 아옹다옹하자, 연두가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았습니다.

“아이참, 나 지금 동생들 집에 두고 잠깐 나온 거란 말이야. 이럴 시간 없어!”

초롱이와 폴짝이를 진정시킨 연두는 풀숲으로 놀러 가자고 했습니다. 셋은 풀잎에서 미끄럼틀도 타고 진흙으로 성도 만들며 재밌게 놀았습니다. 해가 서쪽을 향해 서서히 기울 즈음, 연두는 더 놀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이 있는 개울로 돌아왔습니다. 올챙이 동생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물풀 사이를 천방지축 헤집고 다니는 동생들을 보살피다 보면 연두는 금세 녹초가 되고 맙니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갔던 엄마는 노을이 질 무렵에야 돌아왔습니다.

“우리 왕자님, 매번 엄마 대신 동생들 봐줘서 고마워. 내일은 엄마가 집에 있을 테니 마음껏 놀다 오렴.”

연두는 기뻐서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에게 늘 듣던 “왕자님”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연두는 낮에 폴짝이가 해준 왕자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나도 왕자가 되면 좋겠다. 그럼 동생들 돌볼 일도 없고, 날마다 신나게 놀 수 있을 텐데!’

연두는 빛나는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여유롭게 산책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멋진 갑옷을 입고 공주님을 구하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폴짝이의 말마따나 정말 꿈같은 일이었지요.




다음 날 아침, 연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을 향해 나섰습니다.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잠자리 떼가 날아갔습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투명한 날개가 정말 눈부셨습니다. ‘우아’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연두는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잠자리들을 바라보다 나무에서 장수풍뎅이를 발견했습니다. 곧게 뻗은 뿔, 윤기 나는 늠름한 밤색 갑옷 덕분에 마치 곤충들의 왕처럼 보였습니다.

“부럽다…. 나도 근사한 모습이고 싶어.”
“어제 그 개구리 왕자처럼?”

초롱이의 물음에 연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왕자가 되어서 동생들은 유모에게 맡기고, 우아하게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 좋겠다고요.

“옛날에 엄마가 나를 강에서 주워 왔다고 하신 적 있는데, 사실 나도 다른 나라의 왕자였던 건 아닐까?”


연두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푸하하, 우리 엄마도 그러셨는데! 그럼 우린 언제쯤 왕자로 변할까?”

폴짝이는 내친김에 왕자 놀이를 해보자며 나뭇잎을 망토처럼 두른 뒤 나뭇가지를 주워 멋진 검인 듯 휘둘렀습니다. 초롱이는 거기에 한술 더 떠, 토끼풀을 엮어 동그랗게 만든 뒤 왕관처럼 머리에 썼습니다.

“연두 왕자, 내 칼을 받아라!”

연두는 친구들이 자기 말을 마냥 장난으로 여기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이내 나뭇가지 검을 들고 폴짝이의 결투 신청에 응했습니다.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왕자 놀이를 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하늘에는 여전히 잠자리와 나비가 한데 어울려 날고 있었습니다. 연두는 잊고 있던 개구리 왕자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친구들 덕분에 하루 동안 왕자 노릇을 해봤지만, 그렇다고 날개옷이나 갑옷은 물론 진짜 왕관이 생겨날 리 만무했습니다.

“왕자는 무슨, 집에 가면 또 동생들 뒤치다꺼리하겠지….”

연두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굵은 물방울이 연두의 머리에 툭 떨어졌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은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연두는 얼른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얼마 안 돼 세찬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연두는 콩잎으로 머리를 가리고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집이 있던 개울은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었습니다. 연두는 엄마와 동생들을 부르며 다급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물이 많이 불어난 데다 쉼 없이 요동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두는 물풀 사이를 헤치다가 겨우 동생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몇몇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생들을 찾아 헤엄쳤습니다. 한참 물살을 따라가다 보니 커다란 돌멩이들 사이에서 동생들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출렁이는 물살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

연두는 얼른 뭍으로 나와 큼직한 잎 하나를 뜯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물에 들어가 잎사귀로 동생들을 감싸 안고 무사히 집까지 데려왔습니다. 물풀 사이에 내려놓은 동생들이 혹여 다시 떠내려갈까 봐 그 앞을 꼭 지키고 서서 엄마를 기다렸지요.


비가 잦아들 즈음, 연두와 동생들을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연두는 얼른 폴짝폴짝 뛰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습니다.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엄마는 연두를 보자마자 부둥켜안았습니다.

“무사했구나, 연두야!”

엄마는 허둥지둥 동생들이 모두 있는지 살폈습니다. 다 무사하자 가슴을 쓸어내렸지요. 엄마는 이웃 마을에 잠깐 개구리밥 씨앗을 얻으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바로 물에 뛰어들었는데, 순식간에 불어난 물살에 휩쓸렸다가 겨우 돌아왔다고요. 엄마는 빨리 오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 아까 연두 형 진짜 멋졌어요.”
“우리가 벌벌 떨고 있는데 왕자님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줬어요!”
“우리 오빠가 최고야!”

동생들은 입을 모아 연두를 칭찬했습니다. 엄마는 연두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우리 연두 왕자님, 정말 기특하군요.”

엄마의 말에 연두는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비록 멋진 갑옷도 없고 공주님이 아닌 올챙이 동생들을 챙겨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짜 왕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나도 커서 연두 형처럼 멋진 왕자님이 될 거야.”

동생의 말에 연두는 어깨를 으쓱이며 에헴, 헛기침했습니다.

“그때쯤이면 나는 왕세자가 되어 있을 거야.”

잔잔한 연못에 연두를 만나러 온 초롱이와 폴짝이가 퐁당 뛰어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연두가 나타나지 않네요. 폴짝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크게 외쳤습니다.

“연두 왕자님! 우리 왔어요~.”

그제야 연두가 풀숲에서 고개를 내밉니다. 초롱이는 언제까지 왕자라고 불러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연두는 팔짱을 끼고 말했습니다. 동생들이 다 커서 엄마의 또 다른 왕자님이 되기 전까지, 자기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왕자님이라고요.

“왕자를 친구로 두다니, 너흰 참 좋겠네. 허허.”

연두가 넉살을 떨자 폴짝이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나뭇가지를 빼 듭니다.

“자꾸 그럴래? 안 되겠다. 연두 왕자, 가만 두지 않겠다!”
“에잇, 질 수 없지!”

치열한(?) 칼싸움이 벌어지자 연못 위를 노닐던 소금쟁이가 구경꾼을 자처합니다. 하늘을 날던 풍뎅이도 살포시 풀잎에 앉아 연못가를 기웃거리네요. 세 개구리의 왕자 놀이는 그날도 계속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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