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 달 동안 부모님을 칭찬하는 일기를 쓰세요.”
도덕 선생님이 낸 숙제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특히 요즘 사사건건 부모님과 부딪히고 있는 나에게는. 우리 부모님은 내 마음을 요만큼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런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하고 있는데 날마다 부모님을 칭찬하는 말을 하라니. 게다가 칭찬 내용과 부모님 반응까지 일기에 써야 한다. 그것도 30번이나!
선생님은 숙제를 부모님이 모르게 하라며 숙제를 잘해온 학생에겐 높은 수행평가 점수와 맛있는 간식을 주겠다고 하셨다. 과연 부모님을 칭찬할 내용이 있기나 할까. 방과 후 학원에 가서도 숙제 생각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밖에 나가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어색함, 유치함,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 내서 말을 꺼냈다.
“엄마, 데리러 와줘서 감사해요.”
엄마가 대답했다.
“갑자기 왜 그래? 혹시 오늘 학원 지각했니?”
친구들하고 놀다가 학원을 몇 번 빼먹은 적이 있다. 그 일이 엄마 귀에 들어간 이후로 엄마는 매일 나를 데리러 오신다. 그 사실을 깜박하고 이런 말을 내뱉다니. 후회가 밀려왔다. 엄마는 집으로 가는 내내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하셨다. 나는 방에 들어와 일기장을 열었다.
다음 날, 반 전체가 술렁거렸다. 도덕 선생님이 내준 숙제 때문이었다. 대부분 칭찬할 내용이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했다는 친구, 마침 옆에 있던 형이 뭐 잘못 먹었냐고 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서 싸우다가 도리어 부모님한테 엄청 혼났다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이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얘가 왜 이래?”였다. 다들 반응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이제라도 숙제를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저녁에 학원 앞에서 엄마를 만나 집에 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에 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엄마는 외출복을 입은 채로 저녁상부터 차리고 계셨다. 오늘 반찬은 내가 좋아하는 계란장조림이었다.
“엄마, 계란장조림 해줘서 감사해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번 더 칭찬의 말을 해보았다. 엄마는 무덤덤하게 얼른 와서 밥 먹으라고만 하셨다. 내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린 것 같았다. 괜히 무안해져서 맨밥만 떠먹고 있는데 엄마가 내 숟가락에 계란장조림을 올려주셨다.
다음 날, 엄마는 학원으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로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엄마가 대답했다.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조심히 와. 과일 깎아줄게.”
왠지 모르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니 아빠가 현관에서 신발 정리를 하고 계셨다. 불룩한 배 때문에 허리가 잘 구부러지지 않는 아빠는 몸을 꽈배기처럼 비틀어서 한 손으로 신발을 집고 계셨다.
“아빠, 생각보다 유연하시네요.”
“생각보다가 아니라 원래 유연했어. 새우도 울고 갔다니까.”
아빠가 넉넉하게 나온 배를 만지며 농담을 하셨다.
나는 점점 부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됐다. 단지 숙제를 위한 일이었지만 칭찬거리를 찾으려고 부모님을 관찰하다 보니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부모님의 좋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부모님께 관심이 생겼다. 아빠가 출근할 때 어떤 넥타이를 매시는지, 엄마가 반찬을 어느 그릇에 담는지 유심히 보게 됐다.
희한하게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집이 점점 좋아졌다. 앞치마를 메고 갓 조리한 음식으로 저녁상을 차려주는 엄마 모습이 예뻐 보이고, 식사 후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는 아빠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 부모님이 모처럼 간짜장을 해 먹자고 하셨다. 이전의 나였다면 혼자 있고 싶다며 방에 틀어박히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을 텐데 이날은 나도 요리에 동참했다. 아빠와 내가 양파를 까면 엄마가 한쪽에서 양파를 써셨다. 매운 향이 눈과 코를 따갑게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니까 행복해요.”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양파를 써시던 엄마가 칼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셨다.
“엄마 울어요?”
“아니, 양파 때문에 그래.”
곁에 있던 아빠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빠도 네가 곁에 있어서 참 좋단다.”
이 말에 나도 눈물이 났다.
“아들, 우는 거야?”
아빠의 물음에 내가 말했다.
“저도 양파 때문에요.”
칭찬 일기 숙제를 마친 날,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일기를 쓴 소감을 발표했다.
“엄마 눈이 엄청 예쁘다는 걸 발견했어요.”
“예전에는 밥 먹고 잠만 자는 곳 같았는데, 요즘 집이 제일 좋아요.”
“우리 부모님은 저보다 더 멋지고 성실한 학생이셨을 것 같아요. 저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시는 걸 보면요.”
“부모님은 저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포기하시는데 저는 부모님 마음을 너무 몰라줬던 것 같아요.”
교실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선생님은 어려운 숙제를 잘 끝내줘서 고맙다며 모두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짭짤한 눈물과 섞여 삼킬 때마다 맛이 묘했다. 짭짤해서 더 달달한 것 같았다. 웃음과 눈물로 빚어진 행복한 가정의 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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