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음 주다!”
하나는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현관에 걸린 달력을 보고는 이내 새 힘이 불끈 솟는 듯 만세를 불렀습니다. 회사 근처에 작은 집을 얻어 혼자 생활하는 하나는 이번에 친하게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 세 명과 함께, 10년째 지키고 있는 우정을 기념할 겸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벼르고 벼르던 여행 날짜가 드디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요. 회사에는 이미 몇 주 전에 휴가를 받아놓았고, 바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기에 마음 놓고 떠날 참이었습니다. 여행 갈 때 챙겨갈 물건들을 수첩에 하나씩 쓰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오빠였습니다.
“응, 오빠!”
“뭐하고 있었어?”
“슬슬 여행 가방 꾸리려고 준비하는 중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야?”
오빠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문방구 셔터를 들어 올리다 허리를 삐끗하셨나 봐. 예전부터 허리가 안 좋다고 하셔서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더니 이렇게 돼버렸네.”
“정말? 엄마는 참, 많이 안 다치셨어? 나한테는 전화도 안 하고….”
“엄마는 무조건 괜찮다고,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아.”
오빠는 다음 주에 정밀 검진을 하기로 예약했다며 이참에 단 며칠이라도 엄마를 쉬게 해드려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쉬는 동안 문방구를 대신 봐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휴가를 내고 싶지만, 다음 주 회사에서 해외 수입상들과의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 어쩔 수가 없다면서요. 출산을 앞두고 있는 올케 언니에게 문방구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냥 며칠 문 닫으면 되잖아!”
“문방구 비우실 분 아니라는 거 너도 알면서.”
“아, 모처럼 가는 거란 말이야. 여행 가려고 적금도 꼬박꼬박 들었는데….”
아쉬워하는 하나에게 오빠는 용돈을 두둑하게 줄 테니 다음에 더 좋은 곳으로 가라며 달랬습니다.
늦둥이인 하나는 오빠와 나이 차가 꽤 나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빠는 어릴때부터 하나에게 늘 너그럽게 대했고, 하나도 그런 오빠를 잘 따랐습니다. 하나는 결국 오빠의 부탁에 승낙했습니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그보다 엄마의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엄마는, 낡은 문구점 이제 그만 정리하시라니까.’
전화를 끊으며 하나가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하나는 엄마가 이제는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여생을 즐길 법도 한데 낡은 문방구를 지키며 고생하는 게 늘 못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문방구를 그만두라는 말을 할 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나는 문방구에 있는 게 제일 행복해. 이게 쉬는 거야.”
행복초등학교 앞 하나문방구는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가게입니다. 근처에 세련된 사무용품 가게가 있지만 학생들은 오래된 하나문방구를 즐겨 찾습니다. 초등학교 뒤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있어 등하교 시간이면 문방구는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문방구를 봐주기로 한 첫날, 휴가라 긴장이 풀린 하나가 깜빡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급한 대로 머리를 질끈 묶고 문방구로 향했습니다. 곧 아이들의 등교가 시작될 텐데 군데군데 녹이 슨 셔터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휴, 이러니 허리가 상하시지.”
낑낑대며 셔터를 열고 진열대를 정리하기가 무섭게 아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은 계산대에 앉은 하나를 보고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뭐 줄까?”
“저어… 저는 4학년인데요, 과학 준비물이 필요해요.”
“준비물이 뭔데?”
“양팔 저울 만들 수수깡이랑 우드락이요.”
“잠깐만, 우드락은 여기 있고, 수수깡은….”
하나가 수수깡을 찾고 있는데 또 다른 아이가 5학년 미술 준비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옆의 아이는 오늘 체육 수업이 있다고 하고요. 하나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뭐가 필요한지 모르니까 물건 이름을 말해줄래? 한 명씩 차례로.”
하나의 말에 아이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들어오기만 하면 몇 학년인지 다 알아요.”
“인사하고 고개 들면 필요한 준비물이 딱 눈앞에 있어요.”
허둥대는 하나를 보다 못한 고학년 아이들이 물건을 대신 찾아주었습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척척 찾아내는 아이들을 보며 하나는 살짝 민망했습니다.
‘평소에 와서 좀 도와드릴걸.’
그날 밤, 문방구 문을 닫고 집에 돌아온 하나는 녹초가 되었습니다.
‘에휴, 친구들은 지금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겠네. 난 뭐야…. 그나저나 내일은 어떡하지?’
하나는 더 고민할 새도 없이 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하고 한산해질 무렵, 하얀 트럭이 덜덜거리며 문방구 앞에 멈춰 섰습니다. 문방구에 물건을 납품하는 정 씨 아저씨였습니다.
“할머니, 물건 왔어요!”
그 말을 듣고 하나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할머니는요? 오늘 들어올 물건이 많은데, 어디 가셨어요?”
하나에게 할머니 안부를 전해들은 아저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트럭에서 박스를 내렸습니다. 하나가 상자들을 어디에 둘지 몰라 두리번거리자 아저씨가 능숙한 솜씨로 박스를 열었습니다. 삼색 볼펜과 캐릭터가 그려진 샤프, 필통에 쏙 들어가는 자와 지우개, 노란색 형광펜까지. 물건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진열까지 도와준 아저씨가 조끼 주머니에서 하얀 봉지를 꺼냈습니다.
“이건 뭐예요?”
“여기 납품한 지 십 년이 다 돼 가는데 올 때마다 음료며 간식거리며 할머니께 매번 받기만 해서요. 요즘 박스 하나 들기도 버거우실 정도로 허리가 불편하신 것 같아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해서 가져왔어요.”
봉지 안에는 파스가 여러 묶음 들어 있었습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선물에 하나는 마음이 찡해졌습니다.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던 하나는 그동안 남들만큼 엄마를 살뜰히 챙겨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할머니가 다음 주에야 온다는 말에 울상이 되어 돌아갔던 아이 한 명이 문방구를 다시 찾았습니다. 아이는 서툰 솜씨로 접은 색종이 꽃을 계산대에 올려놓았습니다.
“할머니한테 행복초등학교 4학년 3반 이하영이 접은 거라고 말해주세요. 꼭요!”
여자아이가 돌아간 뒤, 이번에는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멘 남자아이가 왔습니다.
“지난번에 필통을 잃어버려 속상했는데 할머니가 새 샤프를 선물로 줬어요. 할머니한테 이것 좀 전해주세요.”
아이가 음료수 한 병을 건넸습니다. 음료수 병에 아이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이후로도 문방구를 찾는 어린 손님들이 다들 할머니 안부를 물었습니다. 덕분에 하나는 같은 대답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지만, 오랜 세월 문방구를 지켜온 엄마가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면서 뿌듯함마저 느껴졌습니다.
금요일. 문방구를 봐주기로 한 마지막 날입니다.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문방구로 들어왔습니다.
“할머니가 이 삼색 볼펜이 필기감이 좋다고 하셨어.”
단발머리 학생이 삼색 볼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안경을 쓴 학생은 형광펜을 고르며 말했습니다.
“나는 형광펜을 어떤 색으로 살까 고민하다 할머니 찬스를 썼는데, 역시 할머니가 추천해준 펜은 두말 할 필요 없어. 벌써 두 개째 쓰고 있어.”
“나도 얼마 전에 샤프를 사려다가 할머니 찬스로 연필을 샀는데 심이 부드러워서 좋더라고. 깎아서 써야 하긴 하지만 써보니까 샤프보다 나아.”
‘할머니 찬스’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하나에게, 여중생들은 어떤 걸 살지 고민될 때 할머니께 물으면 딱 맞는 것으로 골라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할머니 찬스’라 부른다고요. 학생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걸 알아서 챙겨주는 할머니가 꼭 친할머니 같다고 했습니다. 할머니의 정이 담겨서인지 하나문방구 물건은 다른 문방구와 똑같은 물건도 더 좋게 느껴진다고요.
“난 여기에 물건을 사러 오는 게 아니라 우리 할머니 집에 오는 것 같아.”
“맞아, 여기서 산 연필을 쥐고 있다 보면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마음이 편해져.”
“할머니가 가게를 오래오래 하셨으면 좋겠다. 그치?”
“당연하지! 다음 주에 할머니께 안부 인사드리러 다시 오자.”
학생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던 하나 입가에도 미소가 머금어졌습니다. 그 순간 엄마도 문방구에 어서 돌아오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문방구로 돌아와 학생 손님들을 반겨줄 모습이 훤히 그려졌습니다. 엄마가 왜 굳이 문방구를 계속 지키려고 하는지, 엄마에게 문방구가 얼마나 특별하고 행복한 공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손님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슬슬 문 닫을 시간이 되었지만 하나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느긋하게 한 주일을 돌아보며 향기처럼 퍼지는 여운을 마음속에 고이 담았습니다.
다음 날, 하나는 두 손에 과일을 한가득 사 들고 엄마 집을 찾았습니다. 엄마 집에는 오빠네 가족도 와 있었습니다. 오빠가 하나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하나 네가 일주일 동안 가게 보느라 고생 많았다.”
“고생은 뭘. 엄마가 늘 고생이지.”
“어머, 우리 아가씨 철들었나 봐. 호호.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입이 한 뼘은 나왔을 텐데.”
어릴 적 하나네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하나를 오랫동안 봐왔던 올케가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언니는, 내가 철든 지가 언젠데 그래?”
하나는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엄마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엄마, 이걸로 셔터 문 바꾸고 계산대에 안마기도 하나 두세요.”
모두들 하나와 봉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습니다.
“너 여행 가려고 모아 두었던 경비 아니야?”
오빠가 물었습니다. 하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여행? 벌써 다녀왔지. 하나문방구로. 두고두고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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