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이와 보송이의 집짓기


하늘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드는 저녁이 되면 비버들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씩씩하고 든든한 남편 보들이와 싹싹하고 상냥한 아내 보송이는 기지개를 켰습니다. 유난히 노을이 고운 오늘은 보들이와 보송이가 새 보금자리를 꾸미는 날입니다. 보들이와 보송이는 새로운 보금자리 만들 곳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얼마쯤 갔을까요, 보들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숲에서 뭘 좀 먹고 갈까요?”
“그래요!”

둘은 강가로 올라왔습니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저녁 이슬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보들이와 보송이는 익숙한 솜씨로 나무 밑동에서 껍질을 벗겨내고는, 연한 속살을 뜯어서 신선한 새싹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정도 굵기의 나무면 댐 만들기에 딱 좋겠네요. 그렇죠?”

나무 밑동을 유심히 보던 보송이가 말했습니다.

“어디든 나무가 있으니, 적당한 걸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집 짓는 건 시간문제죠! 하하.”

자신감 넘치는 보들이의 말에 보송이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목적지인 강 중류에 도착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보들이와 보송이는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다정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헤엄쳐 갔지요.

하늘에 별이 총총 떠오를 때쯤 둘은 강 중류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집의 기초인 댐을 만들 나무를 구해야 합니다. 보들이가 가까운 곳에서 키 큰 나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 나무 어때요?”
“오, 한번에 많은 물을 가두기에 좋겠어요.”

둘은 나무 쪽으로 갔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튼실했습니다. 보들이가 자신만만하게 다가가 나무 밑동을 갉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아야!”


별안간 뒤통수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들자 성난 얼굴로 날개를 파닥이는 딱따구리가 보였습니다.

“밤중에 남의 집에서 뭐하시는 거예요!”
“집, 집이라고요?”

보들이와 보송이가 어리둥절해하며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아기 딱따구리 세 마리가 나무에 난 둥근 구멍으로 올망졸망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나무에는 우리 가족이 살고 있어요. 설마 베려는 건 아니죠?”
“어머, 실례를 범해서 죄송해요. 나무가 좋아 보여서 그만….”

보송이의 사과에 마음이 누그러진 딱따구리가 건너편에 튼튼한 나무가 많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보들이와 보송이는 딱따구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강을 건넜습니다.

딱따구리의 말대로, 그곳에는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보들이는 그중 하나를 골라 밑동에 이빨을 댔습니다. 그 순간 나무에 붙은 조그맣고 새까만 점 하나가 움직였습니다 개미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이, 깜짝이야!”

보들이 목소리에 놀란 개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먹이를 놓칠 뻔했습니다.

“저, 혹시 이 나무를 베어 가도 될까요? 댐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보들이의 말에 개미가 펄쩍 뛰었습니다.

“뭐라고요? 이 나무는 우리 곤충들의 아파트예요. 아래층엔 개미, 위층엔 하늘소, 꼭대기에는 매미가 사는 걸요.”
“휴, 그렇군요….”

보들이와 보송이는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다른 나무들도 하나같이 벨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청설모 가족이 사는 나무, 부엉이 할아버지가 교실로 쓰고 있는 나무, 다람쥐 가족이 식량 창고로 사용하는 나무, 고슴도치의 은신처인 나무, 겉은 멀쩡한데 속이 썩은 나무…. 적당한 나무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얼른 댐을 만들고 집을 지어야 할 텐데.’

의기양양하던 보들이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열심히 나무를 찾아다녔지만 아침이 오고 있어 더 이상은 무리였습니다. 녹초가 된 보들이와 보송이는 결국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와 강가에 쌓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지요.



바스락.

단잠을 자던 보들이가 예사롭지 않은 발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왜 그래요?”

기척에 잠을 깬 보송이가 물었습니다.

“쉿! 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보들이의 예상은 정확했습니다. 허기진 곰이 먹을 것을 찾아 강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보들이와 보송이는 곰이 자신들을 발견할까 봐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이게 뭐지?”

나뭇더미를 발견한 곰이 킁킁거리며 콧구멍을 갖다 댔습니다. 그러고는 날렵하게 앞발을 휘둘러 나뭇가지를 흩었습니다. 이리저리 흩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겁에 질린 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두 비버가 보였습니다.

“뭍에서 비버를 만나다니 이게 웬 횡재야? 먹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곰은 앞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입맛을 다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보들이가 잽싸게 나뭇잎을 한 줌 쥐어 곰에게 던졌습니다. 나뭇잎이 얼굴에 달라붙자 갑자기 앞이 깜깜해진 곰이 당황하며 허둥댔습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보들이가 소리쳤습니다.

“물속으로 도망쳐요!”

보송이를 이끌고 강물로 뛰어든 보들이는 넓적한 꼬리를 휘저으며 속력을 냈습니다. 보송이도 보들이 곁에 꼭 붙어서 물갈퀴가 달린 뒷발을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곰이 강물까지 쫓아왔지만 둘을 따라잡기에는 어림없었습니다.

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신없이 강을 헤엄쳐 온 보송이와 보들이는 뭍에 올라 큰 바위 옆에서 숨을 골랐습니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었지만 곰이 다시 나타날까 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다시 저녁이 되었습니다. 종일 잠을 설친 탓에 보들이는 온몸이 쑤셨습니다. 보송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계속 쉴 수만은 없었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보송이가 코를 훌쩍였습니다.

“옛날에 살던 집은 포근하고 안전했는데….”

둘은 강가에 앉아 해가 산 너머로 얼굴을 감추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살던 아늑한 고향 집을 떠올렸습니다.

“창고에서 몰래 음식을 먹다가 창고 바닥의 나무껍질까지 갉아 먹은 적이 있어요. 엄마가 창고에 자꾸 물이 새서 무슨 일인가 하셨대요.”
“호호, 나는 친구랑 집 안에서 뛰어놀다 바닥에 구멍을 냈었는데.”
“한번은 집수리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진흙으로 창문을 막는 바람에 부모님을 더 번거롭게 해드렸죠, 하하.”
“나도 부모님을 도운 적이 있는데 진흙이 코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재채기를 했어요.”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힘이 불끈 솟았습니다.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줄 보금자리를 하루 빨리 만들고 싶어졌지요.

“산불이 났을 때였어요. 부모님은 숲속 동물들에게 댐을 다리 삼아 건너게 해주셨어요. 덕분에 모두 안전하게 이웃 마을로 대피할 수 있었죠.”

보들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장차 태어날 아이들과 숲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는 따뜻하고 튼튼한 집을 지어요.”

보들이와 보송이는 손을 맞잡았습니다.

숲에는 비버 부부가 튼튼한 나무를 구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동물들을 도와준 비버가 보들이 부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딱따구리와 청설모는, 오가면서 괜찮은 나무를 보면 보들이에게 귀띔해주었습니다.

동물들의 도움으로 보들이는 훌륭한 재료들을 하나씩 모을 수 있었습니다. 보들이가 앞니로 나무를 갉아서 강물 속으로 쓰러뜨리면 보송이는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랐습니다. 그리고 함께 돌과 진흙을 구해와 가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꿨습니다. 댐이 완성되자 보들이와 보송이는 물살이 약해진 댐 위쪽 강에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되던 날, 숲속 친구들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강 가운데 봉긋 솟은 비버의 집을 보며 함께 축하해주었습니다.




“보송아, 우리 왔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보송이 부모님이 새 집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보송이 아빠는 강을 가로지른 댐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댐이 한눈에 봐도 실하네. 어디서 이렇게 좋은 목재를 얻었는가?”
“숲에 사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보송이 아빠는 겸손히 말하는 보들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살뜰하게 진흙을 바른 솜씨는 어떻고요. 바람 부는 날 지붕 날아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호홍.”

보송이 엄마의 칭찬에 보들이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습니다.

몇 달 뒤, 보들이와 보송이의 보금자리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귀여운 아기 비버 두 마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댐이 생긴 덕분에 잔잔하고 따뜻해진 강에는 새로운 이웃들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댐 주위에 생긴 습지는 무더위에 지친 동물들의 휴식처가 되었지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보들이와 보송이 그리고 아기 비버들은 옹기종기 누워 콜콜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습지에는 사슴 한 마리가 발을 담근 채 물풀을 뜯고 있고요, 댐 위에는 강을 지나던 백조 가족이 잠시 쉬어 가려는 듯 앉아 있습니다.

개구리 가족이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먹고 행복한 합창을 이어갈 때쯤, 보들이와 보송이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둘을 골고루 닮은 아기 비버들을 바라보는 부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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