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느 도시 변두리에 맘씨 좋은 주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아주는 꽃가게가 있습니다. 가게 앞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오밀조밀 진열되어 있어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곤 하지요. 격자창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봉오리 지고 활짝 핀 생화들이 향기를 머금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분홍빛의 작약은 꽃잎을 공처럼 둥글게 오므리고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근사한 연회장으로 가고 싶어!’
작약은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한 할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풍성한 흰머리를 틀어 올리고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한 할머니는 고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오늘 손자가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한다우. 손자에게 줄 꽃다발 하나 예쁘게 만들어줘요.”
“네, 부인. 전체적으로 어떤 색상으로 해드릴까요?”
“내가 손자를 병아리라고 부르거든. 이왕이면 병아리같이 노란색이면 좋겠어요.”
“그럼 연노랑 실거베라와 폼폰국화, 메리골드, 해바라기를 섞어서 만들어드릴게요.”
함께 있던 꽃들이 예쁘게 포장되어 가게를 떠나는 모습을 보니 작약은 마음이 더욱 설레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젊은 남자가 붉은 장미 다발을 포장해 갔고, 다음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여성이 수국과 카네이션 등을 조합한 꽃바구니를 사 갔습니다.
그렇게 꽃가게 주인이 간간이 찾아오는 손님을 친절히 응대하며 몬스테라를 큰 화분에 옮겨 심을 때였어요. 언덕 위 저택에서 일하는 남자가 가게 앞에 자전거를 대고 들어왔습니다. 주인은 익히 알고 지내는 그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오, 스미스 씨. 어떤 꽃을 사러 오셨나요?”
“연회를 준비하는 중인데 꽃이 부족해서 대신 사러 왔어요. 연회장 장식을 맡은 사람은 지금 매우 바쁘거든요.”
연회장이라는 말에 작약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연회라면, 분위기를 화사하게 해줄 거베라, 장미, 라넌큘러스 또… 이 작약도 제격이죠.”
주인은 단에서 작약을 한 송이 빼내어 향기를 한번 맡고는 남자에게 건넸습니다.
“음, 향이 좋군요. 그럼 방금 말한 대로 주세요.”
묶여 있던 단에서 얼떨결에 빠져나온 작약은 다른 꽃들과 함께 날짜 지난 신문지에 둘둘 말린 채, 남자가 타고 온 자전거의 바구니에 실려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2
포장되지 않은 길 가장자리에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초록빛 토끼풀 사이사이로 하얗고 동그란 꽃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세상 구경을 합니다. 그 틈에서 토끼풀꽃 한 송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와, 오늘따라 구름이 더 예뻐 보이는걸?’
언덕 위에 그림처럼 지어진 저택이, 흘러가는 구름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토끼풀꽃은 생각했습니다. 그때 멀리서 자전거 한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왔습니다.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는 신문지로 싼 한 아름 꽃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전거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들썩거린 탓에 꽃을 말고 있던 신문지는 느슨해져 거의 풀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자전거 바퀴가 주먹만 한 돌부리를 밟고 지나가면서 크게 휘청이는 순간, 그만 꽃 한 송이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연회장에 가기를 원하던 그 작약이었습니다.

“아, 안 돼!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작약은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작약이 땅에 떨어진 줄도 모른 채 앞만 보며 부지런히 페달을 굴렸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작약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맑은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이제 진정됐니?”
울다 지쳐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무렵, 누군가 작약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토끼풀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거야?”
“연회장으로 가는 꿈이 산산조각나고 말았어.”
“꼭 거기에 가야 하는 거야?”
“내가 있을 곳이 거기니까.”
“거기에 못 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
“불행하겠지….”
“꿈은 또다시 가질 수 있어.”
“…….”
작약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너는 꿈이 뭔데?”
“내가 있는 곳이 꿈이야.”
“아니, 네가 바라는 것 말이야.”
“내가 있는 이곳에 다 있어. 푸른 하늘,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 우리의 친구 벌과 나비, 해가 지면 하늘을 수놓는 별들! 주위에 있는 모든 걸 사랑하면 어디에서든 꿈을 이룰 수 있어.”
작약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토끼풀꽃의 말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왠지 한 줄기 빛이 어두운 마음을 비추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치는 곳에서 희망이 싹트는 것 같았습니다.
#3
“로사, 우리 네잎클로버 찾자. 네잎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온대.”
“난 그런 거 안 믿어. 빨리 가서 숙제나 하자.”
“치…. 난 놀고 싶은데.”
로사는 놀다 가자는 친구의 말에 숙제를 핑계 댔지만, 사실은 엄마 걱정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며칠째 힘없이 누워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니까요. 오늘은 집에 갔을 때 엄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겨주던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로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로사의 눈에 무성한 토끼풀 사이로 분홍색 공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저게 뭐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잎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한 송이 꽃이었습니다. 로사는 꽃을 주워 향기를 한번 맡고는 친구의 코에도 갖다 댔습니다.
“와, 향기 좋다.”
“엄마한테 주면 좋아하겠지?”
“그럼 엄마한테 토끼풀꽃으로 팔찌도 만들어 드려.”
어떻게든 놀고 싶은 로사의 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둘은 토끼풀밭에 쪼그려 앉아 반지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었습니다. 분홍색 꽃과 함께 꽃팔찌를 받고 좋아할 엄마 생각에, 로사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엄마!”
“오, 로사 왔니?”
“선물이에요.”
로사는 엄마의 팔에 토끼풀꽃으로 만든 팔찌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분홍색 꽃은 유리병에 꽂아 엄마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놓았습니다.
“작약이구나. 작약은 만개하면 매우 풍성하고 탐스럽단다. 그래서 함박꽃이라고도 하지.”
“활짝 핀 모습을 얼른 보고 싶어요.”
“조만간 필 거란다. 꽃이 피면 엄마도 왠지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정말요?”
“그럼. 로사가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 덕분에 벌써 힘이 나는걸?”
마주 보는 로사와 엄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습니다. 작약과 토끼풀꽃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걸 사랑하면 어디에서든 꿈을 이룰 수 있어.’
작약은 토끼풀꽃이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습니다. 꿈꾸던 연회장은 가지 못했지만, 작약은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집, 딸아이와 엄마의 환한 얼굴, 정다운 대화.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줄기로 물을 흠뻑 빨아올리니 몸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며 꽃잎이 간질간질했습니다. 내일이면 그동안 모아둔 힘을 한꺼번에 발산해 꽃잎을 활짝 피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사의 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염원하면서, 함박꽃이라는 이름처럼 풍성하게 피어 행복을 나누고픈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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