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온다! 으아악!”
쏴아-
매끈매끈한 자갈이 저 끝까지 펼쳐진 해변에 푸른 파도가 밀려오면, 어김없이 높은 비명이 울려 퍼집니다. 파도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동글이의 외침입니다. 바닷물에 푹 젖은 동글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립니다.
“아으, 차가워. 이 지긋지긋한 파도를 언제까지 뒤집어써야 하는 거야.”
맑은 파도에 세수를 마친 꼬마 게는 동글이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샐샐 웃고 있습니다.
“아, 개운해.”
상쾌하고 산뜻한 표정의 꼬마 게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껏 흘겨보던 동글이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그럽니다.
“나도 너처럼 다리가 있었더라면 이곳에 이렇게 누워있지만은 않을 텐데. 파도가 없는 곳으로 올라가서 여기저기 구경 다닐 거야. 산이라는 곳에 가면 나 같은 돌들이 많은데, 바위라고 부르는 엄청나게 큰 돌도 있대. 그리고 신기한 동물, 벌레들도 무지 많대!”
“동글아, 네가 있는 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서쪽으로 쭈욱 걸어가면 큰 바위섬이 있어. 그리고 이 해변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동물과 벌레들이 살고 있다고. 그런데도 여길 떠나고 싶어?”
꼬마 게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동글이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다부지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난 이 해변이 싫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파도! 매일 철썩철썩 아프게 때려대는 파도가 제일 싫…!”
쏴-
동글이의 말이 마침 밀려온 파도에 흩어져버리고, 꼬마 게도 파도를 타고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어느덧 밀물이 가득 차올랐으니, 이제부터는 기나긴 잠수 시간입니다.
다음 날, 꼬마 게가 어김없이 동글이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 동글이는 짜증도 불평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동글아,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꼬마 게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한참을 고민하던 동글이가 큰 결심을 한 듯 꼬마 게를 부릅니다.
“꼬마 게, 너한테 부탁이 있어.”
동글이의 말에 꼬마 게가 두 눈을 도르르 굴리며 묻습니다.
“뭔데?”
동글이가 비장하게 대답합니다.
“잠수 시간에 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어. 네가 날 좀 업어줘야겠어!”
때 아닌 폭탄선언에 동글이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던 꼬마 게가 집게발로 머리를 긁적입니다.
“끄응…. 아직 어린 내가 널 업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동글이 너, 지금 바닥에 콕 박혀 있는 거 아니니? 거기서 어떻게 나오려고?”
“그건 걱정하지 마. 다른 돌들처럼 파도가 미는 대로 굴러다니기 싫어서 여기 박혀있던 거니까. 파도가 나를 덮칠 때 네가 집게발로 밀어주면 금방 나올 수 있어. 어때, 해줄 거지?”
마침 저 수평선 끝에서부터 제법 높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꼬마 게, 준비됐지? 셋, 둘, 하나, 밀어!”
제대로 심호흡도 하지 못한 꼬마 게는 얼떨결에 집게발을 들어 동글이에게 가져다 댑니다. 그 순간 동글이와 꼬마 게 위로 밀려온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졌습니다.
“아앗! 무, 무거워! 꼬마 게 살려!”

파도와 꼬마 게의 집게발에 몸을 맡긴 채 바닥에서 쏙 뽑혀 올라온 동글이는 바다로 되돌아가는 파도에 실려 꼬마 게의 등껍질로 폴짝 뛰어올랐습니다. 그에 화들짝 놀란 꼬마 게는 버둥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칩니다. 역시 아직은 동글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 미안 미안. 내려갈게.”
아파하는 꼬마 게에게 급히 사과하며, 동글이는 다시 밀려온 파도에 실려 꼬마 게의 등껍질에서 내려왔습니다.
“정말 미안해. 다치지 않았니?”
“아니, 괜찮아. 나도 미안해. 널 업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지 않아서….”
착한 꼬마 게의 말에 동글이의 마음이 더 무거워집니다.
그날 밤, 동글이는 바다 위로 떠오른 달과 별들을 보며 한숨만 폭폭 내쉬었습니다.
“저 달도 별도, 나 같은 돌덩어리라고 하던데…. 반짝반짝 예쁘기도 하지. 그런데 나는 여기서 물벼락만 맞고 있고…. 아, 초라한 내 신세.”
까만 밤에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검은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르고 동글이를 아프게 때려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끼룩끼룩- 탁!
“으악! 뭐, 뭐야!”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동글이의 몸에 잔뜩 묻어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어찌 된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동글이 앞에 갈매기 두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어휴, 이걸 어째. 미안해요, 우리 애가 실례를 했네요….”
엄마 갈매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곁에 있는 아기 갈매기의 등을 떠밀며 “어서 죄송하다고 해, 얼른!”이라 말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아기 갈매기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는 동글이는 애써 웃어 보입니다.
“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파도에 깨끗이 씻겨 내려갈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순간 동글이가 흠칫 놀랍니다. 차갑다, 춥다, 아프다며 싫어했던 파도가 더러워진 자신을 씻겨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에 동글이는 내심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러게요, 다행이지 뭐예요. 저기 산속이었더라면 비가 올 때까지 더러워진 채로 살아야 할 텐데. 정말 고마운 파도예요, 호호.”
그렇게 웃던 엄마 갈매기가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당신은 왜… 구르지 않지요?”
엄마 갈매기의 질문에 동글이가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그, 그건 제가 원하지 않아서….”
“주변을 둘러봐요. 다른 돌들은 모두 파도가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쉬지 않고 구르는데 당신만 가만히 멈춰 있잖아요. 구르고 있었다면 우리 아기 실수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동글이는 어떻게 하면 이 해변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해 봤지, 왜 다른 돌들이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쉼 없이 구르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고 싶어서 땅속에 박힌 채 살아왔고 땅에서 뽑혀 나온 후에도 다른 돌들처럼 굴러야겠다 마음먹은 적이 없었지요.
“얼핏 듣기론 마음이 무거운 돌은 구르지 못한다고 하던데, 혹시 당신도 그런 거예요?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엄마 갈매기와 아기 갈매기가 날갯짓하며 사라진 후, 동글이는 진지하게 고민해봅니다. 사실, 오랫동안 콕 박혀있었던 땅속에서 나온 오늘, 동글이의 마음이 많이 무겁긴 했습니다. 제 욕심 때문에 아파했던 꼬마 게 때문입니다.
‘구른다고 뭐가 달라지는 걸까. 도대체 나는 여기에 왜 있는 거지?’
동글이는 우두커니 저 어둠 속 어디엔가 있을 수평선을 바라보며 점점 더 깊은 생각의 바다에 잠깁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눈을 떠 보니, 밤을 가득 물들였던 까만 어둠이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햇살에 뒷걸음치는 이른 새벽입니다.
“임자, 다리 아프지 않소?”
“괜찮아요, 영감. 오랜만에 이곳을 걸으니 기분이 정말 좋아요.”
일출을 보러 나온 노부부가 해변을 걷다가 이윽고 동글이 곁에 멈춰 서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봅니다.
“기억나오, 임자? 40년도 더 되었지, 아마.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해돋이를 보며 임자가 했던 말.”
“너무 옛날 일이라…. 제가 뭐라고 했었지요?”
문득 궁금해진 동글이도 노부부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임자가 그랬지, 이곳은 거대한 무대라고. 물결과 물결이 부딪히는 시원한 파도 소리, 파도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자갈 구르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 이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청량한 바람 소리가 지상 최고의 오케스트라이고 저 햇살은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라고 했소. 우리는 그 위대한 공연에 공짜로 초대받은 운 좋은 관객이라고 말이오.”
“아, 맞아요. 그랬지요. 지금도 여전하네요. 감동적이에요.”
동글이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어디 붙어있는지 모를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을 엿들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늘 떠나고 싶었던 이 해변이 그런 엄청난 공간이었다니, 그 속에서 자신은 악기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가만히 멈춰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늘 곁에서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 못하고 흘려보낸 지난 시간이 너무나 허무하고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동글이는 밤새 고민했던 어지러운 생각들이 단번에 정리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 멀리서 푸른 파도가 힘차게 달려옵니다. 그토록 밉기만 했던 파도가 지금은 동글이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아침 햇살을 가득 머금은 동글이와 해변의 자갈들이 지난밤 보았던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아름다운 교향곡의 주인공이 되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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