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퍼 소동


“보민아, 오늘 날씨 춥대. 따뜻하게 입고 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 보민이에게 엄마가 말했습니다. 보민이는 엄마 말씀을 듣고 겉옷을 꺼내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습니다.

‘뭘 입고 가지?’

이 옷, 저 옷 들춰봤지만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너무 무겁고. 이건 너무 얇고. 이건 색이 너무 밝은데. 음…. 어쩌지?’

그때, 지지난 주에 언니가 새로 산 점퍼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 이거 얼마 전에 언니가 산 건데, 오늘 왜 안 입었지?’

보민이는 점퍼를 꺼냈습니다. 무난한 카키색에 따뜻하고 가벼운, 보민이 마음에 쏙 드는 옷이었습니다. 언니도 새로 사서 몇 번 안 입었는지 옷에서 빛이 나는 듯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보민이는 결심한 듯 언니의 점퍼를 입었습니다. 보민이는 중학생이라 고등학생인 언니보다 하교 시간이 빠릅니다. 학교가 끝나면 얼른 집에 돌아와 점퍼를 제자리에 걸어놓을 요량이었습니다. 등굣길, 엄마 말씀대로 날씨가 제법 추웠지만 보민이는 언니의 점퍼 덕분에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와, 너 옷 샀어? 예쁘다!”

교실에 들어서는 보민이에게 채영이가 말했습니다. 채영이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보민이에게 집중됐습니다.

“너 카키색 잘 어울린다!”
“맨날 입고 와라.”

친구들에게 옷 칭찬을 한가득 들은 보민이는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도 모르게 점퍼가 언니 옷이라는 사실을 잊은 보민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점심을 먹다 점퍼에 반찬을 흘린 것입니다. 어떻게든 지우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한번 묻은 얼룩은 쉽게 빠지지 않았습니다.

‘헉, 큰일 났다. 언니 화나면 거의 화산 폭발급인데….’

점퍼에 묻은 얼룩을 보며 보민이는 울상을 지었습니다.

언니는 보민이가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평소에도 “너, 내 거 함부로 쓰지 마!” 하고 으름장을 놓곤 하지요. 그런데 언니의 새 옷을 몰래 입은 것도 모자라 얼룩까지 남기다니요. 보민이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보민이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점퍼를 벗어 커다란 쇼핑백에 담았습니다.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언니한테 들킬 게 뻔해. 돈이 좀 들겠지만 얼른 세탁소에 맡겨야겠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언니가 집에 빨리 왔습니다. 언니 목소리에 깜짝 놀란 보민이는 재빨리 점퍼를 꺼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옷장에 걸었습니다.

‘으, 세탁소는 내일 가야겠네. 제발 오늘 밤만 안 들키고 넘어갈 수 있기를!’

다행히 언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보민이는 몰래 점퍼를 꺼내 세탁소에 맡기려고 언니가 먼저 집을 나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방에서 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보민! 이리 와 봐!”

보민이는 단박에 언니가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알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습니다.

“왜?”

잔뜩 화가 난 언니는 손에 카키색 점퍼를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제처럼 안 춥대. 왜 점퍼를 꺼냈어?”
“너, 시치미 떼지 마. 이거 네가 그랬지?”

언니는 점퍼의 호주머니 부분을 내밀어 보였습니다. 얼룩은 시간이 지나 더 선명해져 있었습니다.

“아, 으응. 이거, 어제 내가 실수로….”

언니는 얼버무리는 보민이의 말을 끊었습니다.

“너, 내 물건 함부로 쓰지 말랬지!”


언니의 큰소리에 순간 보민이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말도 없이 빌려 입은 것은 잘못이지만, 얼룩을 남긴 것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였으니까요. 무엇보다 용돈을 들여 세탁할 생각이었는데, 언니가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고 화를 내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언니는 보민이를 한참 노려보다 쌩하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날 오후, 보민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점퍼를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언니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언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짧게 “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잠들 때까지 보민이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재잘재잘 수다를 떨던 두 자매가 조용하니, 집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평소 보민이와 언니는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런 언니와 냉전을 하려니 보민이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언니 옷에 반찬을 흘리기 전으로 아니, 아예 점퍼를 입고 나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보민이는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다음 날, 보민이의 표정이 내내 어두운 것을 보고 채영이가 와서 물었습니다.

“너 무슨 일 있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되게 조용하다. 표정도 안 좋고.”

보민이는 옷 때문에 어제 언니와 다툰 일을 얘기했습니다. 잠자코 얘기를 듣던 채영이가 말했습니다.

“야, 나도 동생 있는 거 알지?”
“응. 남자애 아냐?”
“여동생이거든. 너 언니랑 두 살 터울이지? 나도 동생이랑 딱 두 살 차이야. 우리도 옷 때문에 맨날 싸워.”
“에이, 그래도 넌 언니잖아. 나는 동생이라구. 그것도 아주 까탈스러운 언니의 동생.”

보민이는 괜히 심술이 나서 동생한테 잘해주라고 채영이를 타박했습니다. 그러자 채영이가 말했습니다.

“물론 잘해주려고 노력하지. 동생한테 화내봤자 마음만 불편해. 아마 지금 네 언니도 너랑 싸운 거 후회하고 있을걸? ‘그깟 점퍼가 뭐라고, 이게 동생보다 소중한가.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하고. 이건 진짜야. 내 경험담이거든.”
“아니야, 우리 언니는 안 그래. 얼마나 냉정한데.”

보민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후에 미술 수업이 있었습니다. 준비물인 수채 도구를 꺼내려고 사물함을 연 보민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통과 붓이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 쓴 적도 없는데 왜 젖어 있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보민이 어깨 너머로 채영이가 말했습니다.

“아까 3교시 끝나고 연지가 너한테 수채 도구 빌리러 왔었어. 너 화장실 갔다고 하니까 잠깐 빌려 간다면서 들고 가더니, 점심시간에 우리 매점 간 사이에 갖다 놨나 보다.”
“뭐야…. 왜 남의 물건을 맘대로 가져다 쓴대?”

보민이는 불뚝 불쾌감이 솟구쳤습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언니 얼굴.

‘아, 나도 허락 없이 언니 옷을 꺼내 입었지.’

보민이는 언니가 새 옷에 얼룩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능청스럽게 변명만 하려고 했으니, 자신이 언니였어도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민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구점에서 카드 한 장을 샀습니다. 앙증맞은 사과 그림과 함께 ‘내 사과를 받아 줘’라고 쓰인 카드였습니다. 세탁소에 가서 얼룩이 말끔히 지워진 언니의 점퍼도 찾았습니다.

‘카드를 써서 점퍼 호주머니에 넣어 놔야겠다.’

보민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날씨가 다시 추워졌습니다. 친구들은 보민이에게 새로 산 카키색 점퍼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 점퍼? 그거 사실 언니 옷인데, 그날 몰래 입고 나온 거였어.”
“정말? 너 그 옷에 반찬도 흘렸잖아. 언니가 뭐래?”
“완전 화냈지 뭐. 얼룩은 세탁소에 맡겨서 지우긴 했는데….”

친구들이 보민이 이야기를 듣고 ‘대담한 동생’이라고 떠드는 바람에 교실에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지금쯤 언니는 편지를 읽었을까?’

아침에 언니가 카키색 점퍼를 입고 나간 게 떠올랐습니다. 언니가 주머니 속 카드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나서는데 보민이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언니가 보낸 문자메시지였습니다.

「한보민, 카드 잘 봤다. 지금쯤 집에 가고 있겠네? 매번 느끼지만 넌 참 네 맘대로야. 사고도 맘대로 쳐놓고, 사과도 맘대로 먼저 하고. 나도 너한테 미안해. 산 지 2주 된 점퍼가 뭐라고, 15년을 같이 산 동생을 그렇게 구박하다니 말이야. 너도 나랑 취향이 비슷해서 카키색 좋아하잖아. 그런 동생한테 점퍼 한번 빌려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너무 과민반응 했지 싶다. 집에서 빨아도 될 걸 괜히 세탁비만 쓰게 만들고. 하여튼 미안했어. 이따 집에서 봐.」

보민이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날 저녁, 두 자매는 전처럼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사이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보민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책상 위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보민이 앞으로 온 택배였습니다.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는데…?’

상자를 열어 보니 남색 점퍼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언니 것과 똑같은, 색만 다른 옷이었습니다. 보민이는 영문을 몰라 옷을 들고 엄마에게 가 물었습니다.

“엄마! 이 옷 뭐예요?”
“너 언니랑 옷 때문에 싸운 날, 언니가 슬그머니 와서 네 겉옷 하나 새로 사자고 그러더라. 자기는 용돈 모아서 샀지만, 너는 용돈이 적어서 그러지도 못 할 거라고. 그래서 그날 언니랑 같이 주문했지.”

순간 보민이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에이. 그럼 다른 걸로 사지, 왜 자기 거랑 같은 걸로 골랐대. 우리가 무슨 쌍둥이인가!”

보민이는 괜히 쑥스러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느 날처럼 분주한 아침, 어김없이 엄마의 일기예보가 들립니다.

“보미야, 보민아. 오늘은 더 춥단다! 따뜻하게 입고 가.”
“네!”
“넵!”

두 자매는 오랜만에 같이 집을 나섰습니다. 보미는 카키색, 보민이는 남색 점퍼를 입고요. 엄마는 그 모습이 흐뭇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둘의 뒷모습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재잘재잘 떠들며 나란히 골목길을 걸어가는 두 자매의 머리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살포시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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