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은 날


#1
‘끼이익’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어두컴컴했던 벽장 안이 환해졌어요.

“약상자가 어디 있더라… 아, 여깄네.”

응급 처치에 필요한 약품과 여러 종류의 약이 든 상자를 발견한 로사는 벽장에서 상자를 꺼내어 서둘러 주방으로 가져갔어요. 로사는 이 집의 안주인이에요. 남편 찰스, 아들 에반이 그녀의 사랑하는 가족이죠.

제가 있는 곳은 벽장이에요. 한 쌍의 나무 여닫이문으로 가려진 벽장 안에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여러 개의 선반이 층층이 있고, 선반마다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해요. 로사는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자주 사용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말했어요. 정리 정돈이 안 된 탓에 필요한 물건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요. 가끔 문이 열릴 때면 벽장 속 친구들은 혹시 자신을 찾는 게 아닐까, 기대하곤 하죠.

“로사가 당근을 썰다가 왼손 검지를 베었어.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 밴드를 붙였지.”

벽장으로 돌아온 약상자가 말했어요. 누구든 벽장을 나갔다 오면 물어보지 않아도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곤 해요. 그 얘기에 귀 기울여 상상하며 듣는 것이 어두컴컴한 이 공간에 있는 우리들의 유일한 낙이죠.

“저런, 상처가 깊진 않았어?”
“응, 다행히.”

한때 로사의 애용품이던 이젤이 걱정하며 묻자, 약상자는 덤덤한 투로 대답했어요.

“요즘 로사가 좀 지쳐 보여. 그림 그릴 때면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곤 했는데….”
“찰스는 바깥일로 바쁘고 에반은 사춘기라 방에서 나오질 않으니 외로울 거야. 그런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한가하게 그림 그릴 마음의 여유도 없겠지.”

약상자가 마치 로사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어요. 이 집 식구들이 아프고 상처 입을 때마다 도와주더니, 이제는 마음의 아픈 곳까지 아는 경지에 이르렀나 봐요.

“찰스도 힘들긴 마찬가지일 거야. 밥벌이가 좀 힘들어?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고 비위 맞추는 걸 내가 여러 번 봤어.”

찰스의 출장길을 늘 함께하는 여행 가방이 찰스를 두둔했어요. 자전거 헬멧도 껴들었어요.

“에반도 딱해. 한창 놀고 싶을 때인데, 공부하느라 짬이 없나 봐. 진로와 교우 관계로 고민도 많을 테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자전거 타면서 스트레스 풀곤 하더니 요즘은 통 나가지도 않네. 내 머리에 먼지가 수북이 앉았어.”

로사와 찰스, 에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한마디씩 했어요. 저도 저들의 대화에 끼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요. 이 집 식구들에 대해 아는 게 없거든요. 벽장 밖에 나갔다 온 친구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게 전부이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쪽 구석에서 그저 귀를 열고 잠잠히 듣는 것뿐이에요.



#2
저는 누구일까요.
여기 왜 있는 걸까요.
언제쯤이면 벽장을 나가볼 수 있을까요.

이 집 가족에 대해서만 아니라,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어요. 제가 여기 온 건 에반이 자기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면서 벽장 속에 숨을 즈음이었으니까 꽤 오래전이죠. 그때 에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로사의 엄마가 먼 곳에서 기차를 타고 딸과 사위, 손자를 만나러 왔어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요.


보따리 안에는 직접 수확한 콩, 고구마, 귀리, 땅콩 등 농작물을 비롯해 집에서 만든 과일잼, 꽃잎 차, 피클, 비누 그리고 코바늘로 한 땀 한 땀 떠서 만든 에반의 모자, 프랑스자수를 놓은 손수건 등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예요. 하나같이 정성이 들어간 것들로, 그야말로 선물 보따리였죠. 그 속에 저도 있었어요.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로사는 보따리 크기에 놀라고, 무게에 놀랐어요.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느냐며 엄마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했죠. 로사의 엄마는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며 둘러댔고요. 낑낑대며 보따리를 겨우 들고 엄마와 같이 집으로 온 로사는, 보따리를 풀어 제각기 있어야 할 위치에 정리해 놓았어요. 그러다 저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지요.

“엄마, 이건 왜 가져왔어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로사가 그린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던 할머니가 로사의 손에 든 저를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어요.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엄마도 참, 필요하면 내가 사도 되는데.”
“정작 필요할 때 마련하려면 허둥거리게 되거든.”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로사는 잠깐 고민하더니 저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어요. 그때부터 깜깜한 벽장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죠. 이곳에 온 후로 아직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니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로사나 찰스가 벽장에 있는 물건을 꺼내어 가거나 사용한 물건을 도로 넣을 때마다 이리저리 치여 지금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게 됐죠. 스스로 위축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희망 삼았어요. 그 빛에 의지해 기다림을 이어가며 로사의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했죠.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런데 로사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감감 잊고 있어서 정작 제가 필요한 순간이 왔는데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닐까요.



#3
“이쯤 있었던 것 같은데….”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누군가가 더듬거리는 손길이 느껴졌어요. 로사였어요. 졸고 있던 저는 잠이 확 달아났어요. 로사의 손끝이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하더니 다시 돌아왔어요.

“찾았다!”

로사가 반색하며 저를 움켜쥐었어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드디어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 온 거예요! 그런데 벽장 밖은 늘 환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캄캄하네요. 로사는 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어둠을 뚫고 거실로 갔어요.

우르르 쾅.

밖에서는 천둥소리와 함께 세찬 비가 쏟아졌어요. 창밖도 온통 어둠뿐이었어요. ‘탁, 치익’ 소리와 함께 불이 붙은 성냥이 제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어두웠던 거실이 환해졌어요. 로사의 눈동자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저는 깜짝 놀랐어요. 거실을 비추는 빛이 제게서 나고 있었거든요. 로사가 저를 탁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말했어요.

“양초가 있어서 다행이다.”

탁자를 중심으로 찰스, 로사, 에반이 둘러앉았어요. 찰스는 출장이 잡혀 있었지만 폭우가 내린다는 기상예보로 취소되었대요. 사방이 어두운 것도 폭우 때문에 이 일대가 정전되었기 때문이래요.


“셋이 한자리에 앉는 것도 오랜만이군.”
“당신이 늘 바쁘니까 그렇죠. 에반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에반, 학교생활은 어떠니?”
“피곤해요….”
“요즘은 자전거도 잘 안 타는 것 같은데, 휴일에 모처럼 아빠랑 같이 자전거 탈까?”
“그래, 에반. 운동을 해야 키도 크고 공부도 잘된대.”

로사가 옆에서 거들었어요. 에반은 싫지 않은 듯 입에 바람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는요?”
“엄마는 밀린 집안일 해야지.”
“당신도 같이 가지 그래?”
“에반이 요새 아빠랑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서 마음이 쓰이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이번에는 부자간에 오붓하게 다녀오세요.”
“집안일만 하지 말고 당신도 하고 싶은 것 해요.”
“엄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요.”
“이참에 그림 다시 시작하는 거 어때?”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시간이야 만들면 있지. 집안일은 우리가 거들 테니.”

로사는 가족의 응원에 힘이 나는지 활짝 웃어 보였어요.

“그나저나 정전이 자주 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양초 앞에 두고 이야기하니까 분위기 있고 좋은데요? 안 그러니, 에반?”
“정전이 안 되더라도 촛불 켜고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로사는 좋은 생각이라며 일주일에 한 번 촛불 켜고 이야기하는 날을 만들자고 했어요. 찰스와 에반도 동의했지요. 세 식구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흐뭇하기 그지없었어요. 정전을 계기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데, 앞으로도 종종 벽장 밖을 나와 제 할 일을 다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는 역할이 마음에 들어요. 빛을 내는 만큼 저는 점점 짧아졌지만, 제가 양초인 것에 감사했어요. 그날 천둥 번개와 폭우 속에서 세 가족의 보금자리는 더없이 아늑하고 따듯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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