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짝꿍


“준아, 일어나 세수해야지.”

이불 위에서 뭉그적거리던 준이는 세숫대야에 받은 물을 대충 찍어 바르고는 앞머리를 아래로 당겨 보았습니다. 아무리 당겨도 여전히 눈썹에 닿지 않는 앞머리를 보며 준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쥐 파먹은 듯 삐뚤빼뚤한 머리는 엄마 작품입니다.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가 처음으로 커트에 도전했을 때, 준이는 엄마의 자신만만한 패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머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커트가 끝났을 때 엄마는 눈웃음을 지으며 “어차피 머리는 다시 길잖아?”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요.

얼굴을 닦은 준이는 양말을 깁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갔습니다. 마룻바닥에는 아빠 양말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 문제집 사야 해요.”
“이건 구멍이 너무 커서 버려야겠네. 응, 뭐라고?”
“문제집 사야 한다고요.”
“우리 아들 문제집 사 줘야지. 얼만데?”
“사천 원요.”

준이는 엄마에게 받은 오천 원권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윗옷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습니다.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엄마가 문제집 사고 남은 천 원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핫도그를 사 먹을까,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까?’

준이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학교가 파한 후, 준이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신나게 축구를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날따라 몸이 가벼워 운동장을 거침없이 달렸더니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상대편 아이가 태클을 걸면서 준이의 바지 주머니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주머니가 반쯤 터졌습니다.

‘엄마의 바느질감이 늘었네.’

교문 밖을 나선 준이는 윗옷 주머니에 돈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책방으로 향했습니다. 책방은 시가지에 있습니다. 책방 근처에는 핫도그도 팔고, 아이스크림도 팔지요. 무엇을 먹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준이는 일단 문제집부터 산 뒤 다시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준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버스정류장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한 푼만 줍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수.”

얼굴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노인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볼은 움푹 패었고 몸은 앙상했습니다. 하루 종일 굶었다는 말이 사실 같았습니다. 뒤집힌 모자 안에는 백 원짜리 동전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노인을 곁눈질하며 지나가던 준이는 문득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거든 네가 할 수 있는 일로 도우렴.’

준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오천 원을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던 준이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노인에게 다가갔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이 돈으로 문제집을 사야 하는데요, 문제집은 사천 원이에요. 나머지 천 원은 엄마가 먹고 싶은 것 사 먹으라고 했는데요, 저보다는 할아버지한테 필요할 것 같아요. 이거 드릴게요. 사천 원 주세요.”

노인은 준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야, 고맙구나. 그런데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서 거슬러줄 수가 없단다. 어디 바꿀 데도 마땅찮으니 여기서 좀만 기다리렴. 벌어서 줄 테니….”

준이는 행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인 곁에 섰습니다. 행인들이 노인과 준이를 힐끔거렸습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가방을 추스르며 나오던 한 부인이 길을 재촉하려다 말고 그들 앞에 섰습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부인은 다시 가방을 열어 오천 원짜리를 꺼내어 모자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준이를 위아래로 훑고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떠났습니다.


부인의 표정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준이는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습니다. 축구하면서 운동장을 누빈 탓에 회색 티셔츠는 땀에 절었고, 반바지는 흙이 잔뜩 묻은 데다 터진 주머니가 너덜거리고 있었습니다. 양말은 한쪽이 흘러내린 채였습니다. 거기에 쥐 파먹은 머리까지 꾀죄죄한 행색을 더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구걸하는 노인과 한 편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했습니다. 그나저나 준이는 오천 원짜리를 놓고 간 부인이 야속했습니다.

‘천 원짜리가 들어와야 할 텐데….’

어쨌거나 사람들이 적선을 많이 해야 빨리 거스름돈을 받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준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효과가 있는지 모자에 돈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백 원짜리 동전을 넣는 할머니, 오백 원을 넣고 가는 아기엄마, 천 원을 내놓는 아저씨…. 심지어 준이에게 직접 돈을 쥐여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준이는 그 돈을 가져도 될지 갈등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모자에 내려놓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모자에 모인 돈도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사천 원을 거슬러줄 만한 돈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모자 속에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천 원짜리 지폐 두 장,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 백 원짜리 동전 일곱 개가 있었습니다.

‘꼬르륵.’

저녁때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운동장을 한참 뛰어다닌 탓에 준이의 배꼽시계가 때아닌 시간에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준이가 본능적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잡으며 배고프다는 동작을 취할 때였습니다.
신문을 말아 쥐고 가던 한 행인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습니다. 행인은 준이의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다가와 슬그머니 지갑을 열었습니다.

‘제발….’

행인은 오천 원권과 천 원권 사이에 손가락을 끼운 채 망설이더니 오천 원권 지폐를 꺼내어 모자에 넣었습니다. 준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쉬운 표정을 짓자, 행인은 난감해하며 다시 지갑을 열었습
니다. 그러고는 천 원권까지 기꺼이 적선했습니다.

‘예쓰!’

준이는 주먹 쥔 손을 들었다 내렸습니다. 행인은 그런 준이를 보고 뿌듯해하며 가던 길을 갔습니다. 노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네가 곁에 있어서인지 오늘은 수입이 꽤 좋아. 그야말로 환상의 짝꿍이로군. 허허.”

노인이 웃자 준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어떻게 네 돈을 이 할아버지에게 줄 생각을 했니?”
“엄마가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했거든요.”
“그래, 엄마가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노인은 주름지고 거뭇한 손으로 느릿느릿 천 원권 세 장과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모자에서 꺼냈습니다. 그런데 준이에게 건네려다 말고 다시 모자에 넣더니, 오천 원과 천 원권 지폐 한 장을 준이 앞에 내밀었습니다.

“네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준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노인은 어서 받으라며 지폐 쥔 손을 준이에게 좀 더 뻗었습니다. 얼떨결에 지폐를 받아 든 준이는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아침에 엄마에게 문제집 살 돈을 받았을 때처럼 꼬깃꼬깃 접어 윗옷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노인을 뒤로한 준이는 곧장 책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느 때라면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집을 산 준이의 발걸음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핫도그 파는 곳이 점점 가까워지자, 배꼽시계가 격하게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준이는 신호를 애써 외면한 채 그 앞을 지나쳤습니다. 이윽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이르렀습니다. 준이는 아이스크림 광고 포스터를 보며 입맛을 다셨습니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그 앞을 통과했습니다.

‘딸랑딸랑.’

한 가게에 멈춰 선 준이는 가벼운 종소리가 울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어떤 물건 찾으세요?”

웃으며 반기는 점원에게 준이가 말했습니다.

“양말 있어요? 엄마 거랑 아빠 거요.”
“물론 있죠. 이쪽으로 오세요.”


준이는 고심 끝에 흰색 여성용 양말과 검은색 남성용 양말을 하나씩 골랐습니다. 점원이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이냐고 묻자 준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기특히 여긴 점원은 예쁘게 포장까지 해주었습니다. 준이는 윗옷 주머니에서 꺼낸 이천 원을 반듯하게 펴서 내밀었습니다.

“엄마 아빠께 선물하려고 모은 용돈이에요?”
“아니요.”
“그럼?”
“환상의 짝꿍이 줬어요.”

준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점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양말이 든 종이가방을 앞뒤로 흔들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삐뚤빼뚤한 머리가 바람에 날려 경쾌하게 나풀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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