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산 중턱의 한 목장. 파란 지붕이 덮인 우리를 나서면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푸르른 목초가 드넓게 펼쳐집니다. 잭 아저씨가 돌보는 수십 마리의 양이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윙-
메리는 정체 모를 기계음에 깜짝 놀라 풀을 뜯다 말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한 손에 윙윙거리는 기계를 든 잭 아저씨가 양을 붙잡아 배를 까도록 드러눕혔다가 다시 뒤집으며 괴롭히는 듯 보였습니다. 기계가 지나간 곳에는 맨살이 드러나고 털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아저씨의 손을 벗어난 양은 발가벗은 모습이 됐습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메리는 뒷걸음쳤습니다. 또래 양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번에 잭 아저씨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여름이 되기 전에 우리 털을 다 깎는대.”
발이 넓어 목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꿰뚫고 있는 레오가 말했습니다.
“털을 왜 깎아?”
“우리 털로 사람에게 필요한 이불도 만들고 외투도 만든다더라고.”
“나도 저렇게 된다고? 너무 흉측해! 윙윙거리는 소리도 무섭고. 나는 절대 안 할 거야.”
메리는 잭 아저씨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멀리 도망쳤습니다. 울타리 끝까지 달려간 메리는 미루나무 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놀란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될 무렵, 털을 다 깎은 레오가 메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뭐 해?”
“뭐하긴, 숨어 있지. 잭 아저씨에게 들킬 수 있으니까 저리 가줄래?”
“그래 봐야 다 보일 텐데?”
아직 털을 밀지 않은 메리를 보고 다른 양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 이러다 들킨다고.”
그때 레오가 말했습니다.
“저런, 이미 들켰는걸.”
멀리서 메리를 발견한 잭 아저씨가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아저씨는 나무 뒤로 얼굴만 겨우 가린 메리를 힐끗 바라보곤 천연덕스레 말했습니다.
“메리가 어디 있을까? 마지막으로 메리만 남았는데.”
잭 아저씨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위기감을 느낀 메리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재빠른 메리를 뒤쫓느라 아저씨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아저씨는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더니 우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메리가 가장 좋아하는 당근을 양손 가득 들고 나왔습니다. 달큼한 당근 냄새에 메리는 입맛을 다셨습니다. 웬일인지 아저씨는 당근을 바닥에 놓고 메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경계하던 메리는 아저씨가 나타나지 않자 슬그머니 당근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행복한 표정으로 당근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메리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습니다.
“요놈, 잡았다!”
#2
우리의 문이 열리자 양들이 푸른 초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가볍게 초원을 누비는 양떼 뒤로 북실북실한 털에 파묻혀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양이 있습니다. 메리였습니다.
“얘들아, 같이 가….”
지난번, 잭 아저씨에게 붙잡힌 메리는 윙윙거리는 이발기가 다가올 때마다 목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습니다. 아저씨는 메리를 어루만지며 진정시켰지만 이발기를 갖다대려고 하면 어김없이 몸부림치는 통에 한동안 메리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억지로 털을 깎다가 메리가 다칠까 봐 염려된 아저씨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메리는 안도의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편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풀 뜯는 시간이면 항상 일등으로 우리를 박차고 나가 싱싱한 풀을 쟁취했는데 이제는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차고 무릎이 아팠습니다.
이날도 다른 양들이 좋은 풀이 있는 자리를 차지할 때, 메리는 홀로 미루나무 그늘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숨을 몰아쉬는 메리 곁으로 레오가 다가왔습니다.

“괜찮아?”
“아니, 힘들어. 무릎도 아프고,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가서 풀을 좀 뜯어올게.”
메리는 레오가 뜯어준 풀로 배를 채우고는 나무에 등을 벅벅 비볐습니다. 덥수룩한 털에 온갖 이물질들이 제멋대로 엉겨 붙어 몸에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가려움증이 심한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아무리 잠을 청해도 몸이 가려워 도저히 잠들 수 없었던 메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를 여닫는 문의 허술한 틈을 비집고 나가 초원으로 향했습니다. 미루나무에 몸을 비비면 좀 나을 것 같았습니다. 달빛에 의지해 어두컴컴한 초원을 걷던 메리는 멀리서 빛나는 두 개의 작은 불빛을 발견했습니다. 불빛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메리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느, 늑대다!”

불빛의 정체가 늑대의 번뜩이는 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메리는 사력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몸이 무겁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아파 속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메리 살려! 살려주세요!”
어둠 속을 달리던 메리는 그만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죽다니….’
메리는 두려움에 떨며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메리의 목덜미로 향하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메리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습니다. 메리를 낚아챈 잭 아저씨는 늑대를 향해 막대기를 휘둘렀습니다.
“저리 가!”
난데없는 잭 아저씨의 등장에 당황한 늑대는 저만치 달아났습니다.
“이 밤에 왜 혼자 나온 거야. 얼른 들어가자.”
잭 아저씨가 메리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메리는 다리가 후들거려 똑바로 걷기 힘들었습니다. 피부병이 순식간에 나은 건지, 너무 놀라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건지, 가려움증이 싹 사라졌습니다. 메리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아저씨를 향한 고마움으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3
동풍에 꽃잎이 흩날리고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었습니다. 푸릇푸릇 새 옷을 입은 초원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자, 슬슬 시작해 볼까.”
준비를 마친 잭 아저씨가 양들을 휘 둘러보았습니다. 메리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 바로 양털 깎는 날입니다. 덥수룩한 털 때문에 생긴 여러 불편과 늑대의 먹잇감이 될 뻔했던 일로 메리는 잭 아저씨가 털을 깎으려고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러자 두려움보다는 무겁고 지저분한 털옷을 얼른 벗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매애-”
메리는 잭 아저씨에게 일등으로 다가갔습니다.
“메리, 그동안 힘들었지? 이리 오렴. 시원하게 밀어줄 테니.”
잭 아저씨는 메리를 조심스레 붙잡고는 가슴과 등, 다리까지 정성껏 털을 밀었습니다. 메리는 몸에 힘을 쭉 뺐습니다. 잭 아저씨를 믿으니까요. 윙윙거리는 기계는 소리만 컸지, 몸에 닿아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엉킨 채 시커멓게 때 묻은 털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내가 여태 저걸 두르고 있었던 거야?’
털을 깎은 메리는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눈을 가리던 털이 잘려 나가니 시야까지 넓어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메리는 초원을 폴짝폴짝 뛰어다녔습니다. 최대한 넓게 원을 그리며 해방감을 한껏 만끽했습니다. 그러다 미루나무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양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넌 왜 여기 있니?”
“털 깎는 거 싫어. 너무 무서워.”
“에이, 별 거 아냐.”
“정말?”
“그럼. 눈 딱 감았다 뜨면 끝나.”
“안 깎으면 어떻게 되는데?”
“관절염에… 피부병에… 불면증에….”
나무 뒤에 숨은 양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이리 와. 내가 같이 가줄게.”
머뭇거리던 양은 슬금슬금 메리를 따라나섰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지난번에도 털 깎기 싫다고 도망친 녀석이 있었지, 아마?”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