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으로 묶어둔 참깨를 탈곡하러 밭에 갔던 영호가 점심 무렵이 되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문에 들어서는 영호를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습니다. 마루에 앉아 소소한 얘기로 수다를 떨던 세 어르신은, 옷에 묻은 먼지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는 영호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어여 와. 고생 많았지? 내가 다리만 안 아팠어도 우리 아들 고생 덜 시키는 건디.”
“에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걸 뭐.”
“이렇게 듬직한 아들이 곁에 있으니 얼마나 좋아.”
옥순, 꽃분, 막례 어르신이 차례로 말했습니다. 영호는 옥순 어르신의 아들입니다. 한마을에 살면서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는 세 어르신은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하며 날마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옥순 어르신이 지난봄에 다리를 수술한 후로는 주로 옥순 어르신 집에 모이게 됐습니다.
“영호야, 이 과자 좀 먹어봐라. 우리 아들이 미국서 보내왔네.”
꽃분 어르신이 영문이 적힌 과자 봉지를 영호 앞에 내밀었습니다. 초콜릿을 입힌 견과류 과자였습니다. 꽃분 어르신의 아들은 미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꽃분 어르신은 그런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합니다. 사업이 잘돼서 엄마에게 미국으로 오라고 성화이지만 비행기 타는 게 무서워 매번 사양한다고, 꽃분 어르신은 주위 사람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하곤 합니다. 종종 아들이 보내줬다며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스카프나 모자를 착용하기도 하지요.
꽃분 어르신의 아들 자랑이 귓등 너머로 들려올 때면 영호는 괜스레 힘이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시골에 홀로 계시게 할 수 없어 누이와 동생들이 집을 떠난 뒤에도 줄곧 어머니 곁을 지키며 농사일을 해온 영호입니다. 그런 자신의 선택에 조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꽃분 어르신의 아들처럼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잘난 것도, 특별히 어머니께 잘해드리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음, 미국 과자 맛있네요. 아드님이 멀리서 과자도 보내주고, 정말 효자네요.”
“그렇지? 효자야, 아주.”
꽃분 어르신이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2
“오늘은 꽃분 어르신이 안 보이시네요?”
“으응, 혈압약 타러 이장님 차 얻어 타고 보건소 갔어.”
대여한 탈곡기를 반납하고 돌아온 영호의 물음에 막례 어르신이 대답했습니다. 영호는 누렁이 그릇에 사료를 부어주고는 창고에서 농기구를 정리했습니다.
“아무래도 꽃분 성님이 수상하요.”
“뭐가 수상한디?”
막례 어르신의 말에 옥순 어르신이 무덤덤하게 물었습니다.
“지난번에 아들이 미국서 보내줬다고 두르고 온 스카프 있잖소. 시장에서 팔더랑게요.”
“미국도 사람 사는 덴데 똑같은 게 있을 수 있제.”
“아니, 미국 물건이 이 시골 장터에 있는 거랑 어째 같을 수가 있당가요?”
“꽃분 동상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으면 되제.”
“우연치고는 너무 수상하지 않어요?”
“꽃분 동상 들으면 서운할 터니 괜히 그런 말 말어.”
“그냥 그랬다고요….”
뜻하지 않게 어머니와 막례 어르신의 대화를 듣게 된 영호의 뇌리에 뭔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영호의 친구가 꽃분 어르신의 아들과 가깝게 지내는데, 한두 해 전에 그에게서 들은 말이었습니다. 꽃분 어르신 아들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져 매우 힘든 상황이라며, 동창들에게 연락해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당시에는 흘려들었던 그 말이, 막례 어르신의 말과 함께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3
“싱싱한 갈치, 고등어 있어요-.”
영호는 생선 장수의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하고 떡집으로 향했습니다.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 고추 따는 일을 마친 영호는 배추 모종도 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찹쌀떡도 살 겸 오후에는 자전거를 끌고 읍내에 나갔습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여유 있게 걸으며, 나온 김에 또 필요한 게 없는지 보려고 이쪽저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영호는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꽃분 어르신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수입 과자 가게 안을 서성이며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영호는 가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에 한 걸음 뗐다가 멈칫했습니다.
‘아들이 미국에서 보내줬다는 과자가 설마…?’
만약 과자의 출처가 수입 과자 가게라면, 또 그 사실을 영호에게 들키게 된다면, 꽃분 어르신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질 거라는 생각에 영호는 그만 발길을 돌렸습니다. 막례 어르신이 했던 말도 어쩌면 자신이 목격한 장면과 같은 맥락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꽃분 어르신이 스카프와 과자를 직접 산 거라면, 왜 아들이 보내준 거라고 하셨을까?’
영호는 꽃분 어르신의 웃음 뒤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따릉, 따릉.’
시장 밖으로 나온 영호는 교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사이를 헤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논밭 사이로 난 흙길을 달리는 영호의 귀에 친구의 말이 맴돌았습니다.
‘그 친구 사업이 어려워져서 결국 다 접었어. 아직 미국에 있는데, 사람들과 연락도 안 하고 두문불출하는 것 같더라고.’
영호는 친구를 통해 꽃분 어르신 아들의 근황을 확인했습니다. 꽃분 어르신이 아들 자랑을 할 때면 괜스레 주눅이 들던 영호였지만, 그의 실패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4
“어머니, 된장찌개가 맛있네요.”
“늙은 호박 하나 썰어 넣었더니 더 맛있게 됐네.”
“식사를 왜 조금밖에 안 하세요?”
“아까 네가 사 온 찹쌀떡을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아참, 관절약이 똑 떨어졌는데 얘기를 못 했네. 너 읍내 가기 전에 미리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일 또 다녀오죠, 뭐. 그런데 어머니, 꽃분 어르신 아들 말이에요, 소식을 들었는데….”
“알고 있다.”
“꽃분 어르신 아들 소식을 알고 계신다고요?”
“이 좁은 촌에 비밀이 어디 있간디. 잘나가던 아들이 그렇게 돼서 꽃분 동상 마음이 안 좋을 텐데,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으면 더 속상하지 않것냐.”
“그럼 아들이 보내지도 않은 걸 왜 아들이 보내줬다고 하셨을까요?”
“그야, 아들 칭찬받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제. 아들 잘한다는 소리 듣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께.”
영호는 꽃분 어르신의 사정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한 어머니의 마음도, 아들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한 꽃분 어르신의 마음도 이해가 갔습니다. 설령 아들이 직접 듣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칭찬하는 말을 하면 아들에게 힘이 될 거라는 일말의 기대도 꽃분 어르신은 품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영호는 어머니가 말한 관절 영양제를 사러 읍내에 있는 약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꽃분 어르신 집을 찾았습니다.
“어르신,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냐, 영호야?”
“제 친구가 아드님과 친하게 지내는데요, 아드님이 그 친구한테 뭘 보내는 참에 어머니께 전해드리라며 같이 보내왔대요. 미국에서 유명한 영양제인가 봐요.”
“그으래? 아이고, 참말로. 갸는 뭐 이런 걸 신경 쓰고 그런댜….”
“아드님이 정말 효자네요. 어르신이 잘 키우셨어요.”
영호는 어머니의 관절 영양제를 사면서 꽃분 어르신 것도 샀습니다. 마침 상자 겉에는 영양제 이름이 영문으로 커다랗게 쓰여 있었습니다. 꽃분 어르신은 기쁘다 못해 감격스러운 얼굴로 영양제를 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해와 영호는 얼른 인사를 하고 돌아섰습니다. 꽃분 어르신의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까치 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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