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 해가 둥실 솟아오른 청명한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당근밭에서 파릇파릇한 이파리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립니다. 이곳은 토끼 삼 형제의 당근 농장입니다. 삼 형제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농장을 물려받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영, 둘째는 농사, 셋째는 저장을 맡고 있지요.
첫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농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랐습니다. 늘 즐겁게 오르는 길이지만 동생들에게 전할 깜짝 소식이 있어서 여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농장에 도착한 첫째는 둘째와 셋째를 불러 모았습니다.
“무슨 일이야? 더워지기 전에 잡초 뽑아야 하는데.”
둘째가 작업복의 흙을 털어내며 말했습니다. 첫째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어. 싱싱 마트에서 입점 제안이 들어왔어!”
셋째가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으며 물었습니다.
“그 대형 마트 말이야?”
“그래! 우리 ‘형제의 당근’을 더 많이 팔 수 있게 됐어. 그러려면 농장 규모를 키워야 할 것 같아. 저장고도 늘리고. 어때?”
첫째가 눈을 반짝였습니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는 난감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거나 머리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왜 말이 없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밭이 더 커지면 일꾼을 고용해야 하는데, 그럼 일꾼 관리도 해야 하잖아? 사실 지금도 버거워.”
둘째의 대답에 셋째도 동의했습니다.
“나도 작은형이랑 같은 생각이야. 저장고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 아직은 성급하지 않을까 싶은데….”
“답답하긴! 더 잘해보자는 건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첫째의 호통에 둘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형, 지금도 충분해. 농장을 더 늘리는 건 욕심이야.”
“내 욕심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너희 앞날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너희도 나중에 가정을 꾸려야 할 거 아냐!”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돼.”
둘째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자, 셋째도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첫째는 못마땅한 얼굴로 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2
농장 확장에 관한 얘기가 있은 후, 첫째는 동생들과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둘째와 셋째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첫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같은 공간에 있게 되면 자리를 슬쩍 피했습니다. 첫째는 첫째대로 동생들에게 서운했습니다. 같이 더 잘해보려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욕심을 부린다며 오해하니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태풍이 불어닥쳐 농장을 휩쓸었습니다. 밭은 군데군데 빗물로 흥건해 진창이 되었습니다. 한창 자라던 잎대는 꺾였고, 빗물에 흙이 쓸려가는 바람에 덜 여문 당근이 여기저기 나뒹굴었습니다.
다음 날 삼 형제는 엉망이 된 농장을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셋째가 번뜩 생각난 듯 저장고를 확인해야겠다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첫째는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여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납품 건 때문인데요, 어제 태풍 때문에 저희 농장에 피해가 났어요. 죄송하지만 납품 날짜를 조율해야 할 것 같아요.”
전화를 붙잡고 여러 차례 통화하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질척한 당근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진흙 속에 파묻힌 당근을 하나하나 골라냈습니다.
통화를 마친 첫째는 둘째를 따라 부러지거나 생채기가 난 당근을 자루에 넣었습니다. 쓸 만한 건 다른 자루에 따로 담았지요. 한동안 말없이 작업에 열중하던 첫째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폈습니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에 쪼그려 앉아 일하려니 목, 허리, 무릎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첫째는 둘째를 보았습니다. 둘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쉬거나 요령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일했습니다. 그 모습에 첫째는 다시 자리를 잡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늦은 오후까지 당근을 골라낸 둘은 자루들을 트럭에 싣고 저장고로 갔습니다. 셋째는 코에 기름때를 묻힌 채 구슬땀을 흘리며 스패너로 저장고 실외기의 연결 부위를 조이고 있었습니다. 셋째가 침수로 고장 난 기계들을 수리하는 동안 첫째와 둘째는 진흙이 묻은 당근을 씻어 선반에 켜켜이 쌓아 말렸습니다. 셋의 작업은 저녁 늦도록 이어졌습니다.
#3
“작은형, 두꺼비집 올려봐!”
저장고 벽에 몸을 붙인 채 전선을 연결하던 셋째가 외쳤습니다. 둘째가 레버를 올리자 저장고의 냉각 팬이 힘찬 소리를 내며 회전했습니다. 셋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고치느라 애썼다.”
“휴, 부품을 교체하느라 오래 걸렸네.”
“이제 포장만 끝내면 되겠다.”
첫째가 동생들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렸습니다. 셋은 작업대에 둘러앉아 비닐 팩에 당근을 대여섯 개씩 넣고 입구를 봉했습니다. 각자 당근 포장에만 몰두할 뿐 아무도 말이 없었지요. 셋 사이에 흐르는 서먹한 기류에 눈치를 보던 셋째가 적막을 깨고 말했습니다.
“형들, 그거 기억나? 아버지랑 삼촌이 같이 농장 운영할 때, 삼촌이 거래처랑 협상이 잘 안돼서 힘들어하면 아버지가 항상 위로해 주셨잖아.”
“그랬지. 두 분 사이가 참 좋았어. 가끔 다퉈도 하루가 지나기 전에 푸시고.”
“맞아. 일할 때 손발도 척척 맞으셨어. 할아버지가 늘 흐뭇해하셨던 게 생각나.”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로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첫째가 넌지시 말했습니다.
“농장 확장 건으로 얘기했을 때 말이야, 너희가 무턱대고 불평만 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같이 일해보니까 고생이 참 많은 것 같다. 농장을 확장하는 것도 좋지만 너희들을 먼저 생각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아니야. 형도 계약 따내랴 일정 조율하랴 고생하는데 나는 내가 힘든 것만 생각했는걸. 무엇보다 우리 앞날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오해했어. 나도 미안해. 그래서 말인데, 가능한 쪽으로 생각해 보자. 막내 네 의견은 어때?”
“나도 찬성해. 이번에 저장고를 수리하면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 저장고가 늘어나도 감당할 수 있을 거야.”
“농장 부지는 언덕 아래쪽 땅을 개간하면 되지 않을까? 경사가 있긴 하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려면 일손이 필요한데….”
“내가 틈틈이 도울게. 저장고 관리가 효율적으로 되면 여유가 생길 것 같아.”
“정말 괜찮겠어?”
“형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식도 잘 키우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둘째와 셋째가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좋아! 자세한 얘기는 차차 하고, 오늘 작업은 여기서 접자. 저녁 먹으러 가야지? 집사람이 당근 케이크 만들어놨대.”
“오, 형수님표 당근 케이크!”
삼 형제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첫째가 박스를 펼치자 둘째가 포장된 당근을 그 안에 가지런히 넣었습니다. 셋째는 박스를 테이프로 봉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형제의 당근’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어 박스 겉면에 적힌 글씨가 반짝 빛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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