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형사와 도토리 도둑


#1
“뭐? 또 범인을 놓쳐?”

숲속 경찰 본부의 곰 반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너구리 형사는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너구리는 사기죄로 수배 중인 청설모를 잡으려 추격전을 펼쳤습니다. 거의 날다시피 하는 청설모를 정신없이 뒤쫓다 그만 땅 위로 솟아오른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지요.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청설모는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곰 반장의 호통에 너구리 형사는 다리를 절뚝이며 반장실을 나왔습니다. 그때 여우 형사가 다가왔습니다. 여우 형사는 한번 수사망에 걸린 범인은 기필코 잡고야 마는 모범 형사입니다.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겠다. 날쌘 청설모를 추격했으니….”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잡을 수 있었는데!”
“그만 털어버리고 몸이나 추슬러. 또 출동해야지.”

여우 형사가 너구리 형사의 어깨를 토닥였습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가 너구리 형사의 퇴근길을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였습니다. 한 줄기 바람에 낙엽이 힘없이 나부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니 너구리 형사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여보.”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너구리 형사는 아내와 아들의 인사를 받으며 집에 들어섰습니다. 폴짝 뛰어올라 품에 안기는 아들에게 너구리 형사가 물었습니다.

“아들,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발표했어요. 저는 아빠를 존경한다고 했어요!”
“아빠를? 왜?”
“아빠는 나쁜 동물을 혼내주고, 착한 동물을 지켜주니까요.”
‘… 아빠도 그러고 싶단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되는구나.’

너구리 형사는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아빠처럼 형사가 될 거라며 재잘거리는 아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더없이 순수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레 차린 저녁을 먹는 동안 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눈을 맞추고 함께 웃다 보니, 먹구름이 낀 듯 답답했던 마음이 서서히 개는 것 같았습니다. 구름 사이에 가려졌던 해가 고개를 내밀며 햇살을 비추는 듯했습니다.

‘그래, 가족이 있으니 힘내야지!’



#2
너구리 형사는 매서운 눈빛으로 벼락 맞은 늙은 나무의 옹이구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도토리가 쌓여 있는, 다람쥐 부부의 식량 창고였습니다. 옹이구멍 근처에는 도토리 껍질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도토리가 언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죠?”

너구리 형사가 다람쥐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일주일 정도 됐어요. 도난당한 양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주변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영 불안해서요.”
“너무 걱정 마세요. 좀도둑이라 금방 잡힐 겁니다.”

다람쥐 부부를 안심시킨 너구리 형사는 잠복할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키 큰 떡갈나무 위에 올라가니 옹이구멍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기기에도 제격이었습니다. 너구리 형사는 가지 위에 엎드린 채 숨죽여 주변을 훑었습니다. 늦은 밤이 되어도 수상한 동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희미한 달빛이 숲속을 비추었습니다. 가만히 엎드려 있자니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새 울음소리에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앉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사사삭.’

검은 형체가 슬금슬금 옹이구멍 쪽으로 접근했습니다. 너구리 형사는 몸을 바짝 움츠렸습니다. 검은 형체는 늙은 나무 주변을 맴돌더니 옹이구멍에 머리를 집어넣고 허겁지겁 도토리를 먹었습니다. 너구리는 재빨리 나무를 내려와 소리쳤습니다.

“꼼짝 마! 당신을 절도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으, 으앙-.”

울음소리에 당황한 너구리 형사가 범인에게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검은 형체를 자세히 관찰하니, 어린 멧돼지였습니다.

“이 밤에 여기서 뭐 하니?”
“배, 배가 고파서…. 훌쩍.”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어요. 엄마는… 많이 아파요.”

너구리 형사는 어린 멧돼지의 행색을 찬찬히 훑었습니다. 털은 꼬질꼬질하고 몸 이곳저곳은 생채기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보살핌받지 못하고 혼자 먹이를 찾아 헤맨 흔적을 보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어린 멧돼지의 반짝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아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아저씨, 저 잡아가는 거예요?”
“응? 아, 아니. 그러니까….”

너구리 형사의 뇌리에 호통치는 곰 반장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너구리 형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흐르는 구름 사이로 손톱달이 보였다 가려졌다 했습니다.



#3
“뭐? 또 범인을 놓쳐?”

곰 반장의 고성에 너구리 형사는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서 순찰이나 돌아!”

반장실을 나온 너구리 형사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본부를 나섰습니다. 너구리 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우 형사가 슬그머니 일어나 곰 반장을 찾아갔습니다.

“오, 우리 모범 형사. 무슨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젯밤 저도 다른 사건을 쫓느라 잠복 중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너구리 형사가 범인과 대치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요….”

여우 형사는 너구리 형사가 늦은 밤까지 잠복한 것, 범인을 잡고 보니 어린 멧돼지였던 것,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멧돼지를 다정하게 타이르며 집에 직접 데려다준 것 등 전날 밤 있었던 일을 곰 반장에게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곰 반장은 너구리 형사를 향해 역정 냈던 마음이 한순간 누그러졌습니다.

“너구리 형사, 어제 일 여우 형사에게 들었네. 왜 사실대로 말 안 했나?”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곰 반장의 호출을 받은 너구리 형사는, 곰 반장의 말에 당황했습니다. 여우 형사가 옆에서 너구리 형사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습니다.

“반장님. 그게… 가여운 어린 멧돼지를 차마 잡아올 수 없었습니다.”
“일단 데려와서 절차에 따라 훈방 조처 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러면 자네 실적에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곳에 데려오면 어린 멧돼지가 다른 용의자들을 보고 겁먹을 수도 있고, 혹 그 과정에서 상처받을지도 몰라 조용히 보내주었습니다.”
“자네도 참, 알겠네. 내가 잘 처리할 테니 걱정 말게.”

너구리 형사는 곰 반장의 나긋한 말투가 낯설었지만, 질책받을 때보다는 한결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햇살이 푸지게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너구리 형사는 아내가 싸준 도토리 도시락을 들고 어딘가로 향했습니다. 풀숲을 헤치며 향한 곳은 어린 멧돼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너구리 형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기는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구리 형사, 여긴 웬일인가?”
“그러는 반장님은 여길 어떻게… 도토리 도난 신고를 했던 분들까지 같이…?”
“이분들이 어린 멧돼지의 사정을 듣고는 돕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네.”
“곰 반장님께 말씀 들었어요. 약자에게 친절을 베푸신 형사님의 행동이 감명 깊었습니다.”
“아니, 전 그냥….”

다람쥐 부부의 정중한 인사에 너구리 형사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어린 멧돼지가 말했습니다.

“아저씨랑 약속한 대로 다른 동물들이 모아놓은 식량 마음대로 안 먹었어요. 그리고 있잖아요, 다람쥐 아줌마 아저씨가 와서 먹을 거를 엄청 많이 주셨어요.”
“그래, 착하구나.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너도 다음에 누군가를 도우려무나.”

너구리 형사는 어린 멧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비록 실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마음속 행복 지수만큼은 급격히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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