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늦은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양과 염소들이 목장의 비탈진 초원에서 자유로이 풀을 뜯고, 목장 아래로 띄엄띄엄 집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집과 집을 흙길이 이어주고 그 길가에는 들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목장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눈에 비친 풍경을 스케치하던 리암은 한숨을 쉬며 그대로 털썩 드러누웠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이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다를 것 없는 일상도 재미없었지요.
‘따분하고 싫증 나. 도시에서 살면 얼마나 즐거울까?’
리암은 눈을 감고 도시의 전경을 상상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빌딩들, 드넓은 강을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 도로를 씽씽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와, 커피를 들고 바삐 걸어가는 세련된 복장의 사람들, 해가 지면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밤거리…. 화려한 도시가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펼쳐지던 그때였습니다.
“리암! 리암!”
언덕 아래에서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리암의 상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리암은 대답 대신 스케치북과 연필을 주섬주섬 챙겨 언덕을 터벅터벅 내려갔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아빠의 먼 친척이 가족과 와서 며칠 묵을 거야. 휴가를 한적한 곳에서 보내고 싶다며 연락이 왔어. 네 또래 마르셀이라는 아이도 있단다. 네가 어릴 때 연회장에서 그 아이와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나니?”
엄마는 당장이라도 손님이 들이닥칠 듯 분주히 이불잇과 베갯잇을 벗기고 찬장에서 접대용 접시를 꺼냈습니다. 엄마의 동선을 눈으로 좇으며 리암은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성대한 연회장에 갔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얼음처럼 굳어 있을 때, 나비넥타이를 한 귀공자 같은 또래 아이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자신이 쓴 시라며 읽어주었지요. 서슴없이 다가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아이가 낯설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났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마르셀이었습니다.
며칠 후, 마르셀의 가족이 저녁 늦게 도착했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잘 지내셨어요?”
“보다시피 우린 무탈하다네.”
“안녕, 리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마르셀을 향해, 리암은 쑥스러운 듯 팔을 뻗었습니다. 소년이 된 마르셀은 첫인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마르셀 가족을 도와 자동차 트렁크에서 여행 가방과 짐을 꺼내어 옮기던 리암은 마르셀의 부모님과 엄마 아빠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덥수룩한 머리에 작업복 차림인 아빠와 달리, 마르셀의 아빠는 정갈히 가르마를 탄 머리에 말쑥한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마르셀의 엄마는 빛바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엄마와 대조적이었습니다. 리암은 마르셀 가족과 비교되는 부모님과 자신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2
“우아, 풍경이 그림 같아!”
마르셀에게 자신의 침대를 양보하고 엄마가 바닥에 깔아준 매트리스에서 잠을 청했던 리암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을 풍경을 바라보는 마르셀의 탄성에 잠이 깬 것입니다. 리암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습니다.
“매일 똑같은걸 뭐.”
“그럼 매일 감탄할 수 있겠네?”
“…….”
“도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어. 캠핑을 떠나거나 국립공원엘 가면 모를까.”
리암은 자신의 스케치북을 마르셀에게 건넸습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유일하던 차에, 마르셀에게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마르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그림에 있는 풍경들을 직접 보고 싶어.”
“화려한 도시에 비하면 별거 아닐 텐데?”
“너야 매일 보니까 그렇지. 난 생각만 해도 기대되는걸? 시상이 마구 떠오를지도 몰라. ”
“좋아, 오늘부터 내가 안내할게.”

리암 부모님이 신선한 재료들로 한가득 차려낸 아침을 배불리 먹은 리암과 마르셀은, 서로 식사가 끝난 걸 확인하고 눈짓을 주고받았습니다. 둘은 동시에 “잘 먹었습니다”를 외치고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스케치북을 들고 부리나케 집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리암이 마르셀을 처음으로 데려간 장소는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습니다. 리암이 어릴 때부터 자주 가는, 부모님과 오솔길을 따라 산책도 하고 친구들과 뛰놀기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리암은 플라타너스 나무를 능숙하게 타고 올라가 가지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마르셀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 닿을 듯 쭉 뻗은 나무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두 팔을 활짝 펴 나무를 안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하며 가까이 혹은 멀리서 들리는 새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음, 나무 냄새 너무 좋다. 새 소리도….”
마르셀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리암은 소리를 내는 새들의 이름을 하나씩 알려주었습니다. 풀숲에 숨은 산딸기를 찾아 마르셀에게 건네기도 하고, 곤충을 잡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박쥐가 사는 동굴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맨발로 흙길을 걷는 둘을, 청설모와 다람쥐가 인사하듯 스쳐 지나갔습니다.

“자, 다음은 목장이야.”
리암이 목장에서 염소젖 짜는 아빠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을 펼쳐 보이며 말했습니다. 둘은 목장으로 신나게 달렸습니다. 목장에는 마침 리암과 마르셀의 부모님도 와 있었습니다. 리암의 아빠가 소젖으로 만든 치즈를 마셀 가족에게 건넸습니다. 치즈를 맛본 마르셀 아빠와 엄마는 깊은 풍미에 감탄했습니다. 리암은 염소에게 먹이를 주고 싶다는 마르셀에게 건초를 주었습니다. 무척 재미있어하는 마르셀이, 가끔 염소 먹이를 주라는 부모님의 심부름을 귀찮아하던 자신의 모습과 상반되었습니다.
스케치북 속 그림을 길잡이 삼아 떠난 여행은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꽃 무리가 펼쳐진 들판, 송사리가 사는 개울, 오리 떼가 헤엄치는 강,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나루터…. 가는 곳마다 마르셀의 “우아” 하는 감탄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르셀을 보며, 리암은 늘 보아왔던 곳들이 새삼 달리 보였습니다.
#3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밤하늘!”
“고작 그거야? 어렵지 않지.”
둘은 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골은 천지가 칠흑같이 캄캄했습니다. 리암은 마르셀을 데리고 나무 계단을 올라 다락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지붕 위로 난 창문을 조심스레 열고 훌쩍 뛰어 창밖으로 나갔습니다. 들뜬 마르셀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리암은 마르셀이 창을 넘을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와, 별이 쏟아질 것 같아!”
“별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걸?”
“도시는 밤에 불빛이 많아 별 구경하기가 어려워.”
“그래서 밤하늘을 보고 싶다고 한 거였구나.”
“오, 카시오페이아다. 저건 전갈자리, 저기는 백조자리….”
“그게 뭐야?”
“별자리 이름. 별들을 이었을 때 연상되는 사물이나 동물의 이름을 붙인 거야.”
“그런 게 있어?”
“자,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가 봐.”
마르셀은 다정한 목소리로 별자리 위치와 모양을 세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리암은 무수한 별들 속에 별자리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습니다. 별자리를 알고 나니 밤하늘은 이전에 보던 밤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알아주지 않아도 별들은 묵묵히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자기들만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별 하나하나가 리암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리암은 깊어가는 밤과 함께 오래오래 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리암,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나도 네 덕분에 즐거웠어.”
다음번에는 리암이 도시에 있는 마르셀의 집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며, 둘은 못내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마르셀은 리암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선물하고 떠났습니다.
마르셀 가족이 돌아가고, 리암도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문득 그리다 만 스케치가 생각난 리암은 스케치북과 연필, 물감을 챙겨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전과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지만 사뭇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리암의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숨어 있는 별자리를 발견했을 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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