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휴, 좀 전에 청소했는데 이게 뭐야.”
행주로 테이블을 닦던 서진은 바닥에 흩어진 빵 부스러기를 보고 구시렁댔습니다. 커피와 페이스트리를 주문한 손님이 빵을 베어 먹다 흘린 것이었습니다. 행주를 싱크대에 던져두고 빗자루를 가지러 가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며 인근 대학교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습니다. 서진은 발길을 다시 카운터로 돌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다섯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대표로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카페라테를 우유 대신 두유로 변경해서 하나….”
“큰 사이즈로!”
중간에 한 학생이 툭 끼어들자, 주문하던 학생이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사이즈 바꿀 사람 또 있어?”
“레모네이드 사이즈 업 할래.”
“다시 주문할게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카페라테를 두유로 변경해서 큰 사이즈로 하나, 레모네이드 큰 사이즈로 하나, 따뜻한 카페모카 휘핑크림 빼고 샷 추가해서 하나요.”
“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카페라테를 두유로 변경해서 큰 사이즈로 하나, 레모네이드 큰 사이즈로 하나, 따뜻한 카페모카 휘핑크림 빼고 샷 추가해서 하나. 맞나요?”
서진은 복잡한 주문 내역을 읊으면서 자신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느껴져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습니다.
“네, 맞아요. 매장에서 먹고 갈 거예요.”
음료를 주문한 학생들은 창가 쪽 테이블로 갔습니다. 서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컵에 얼음을 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잠깐 하려고 했던 카페 아르바이트는 구직 기간과 함께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 외에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었기에 카페 일을 혼자서 도맡아 했고, 사장은 그런 서진에게 최저시급보다 높은 임금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간혹 주문이 밀릴 때면 정신이 없다고 하소연하자,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일하기로 한 아르바이트생은 이틀 뒤에 출근할 예정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카페 문을 닫을 때가 가까울 무렵, 서진은 친구와의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마감을 시작했습니다. 커피 머신과 오븐 등에서 나오는 설거짓거리들을 싱크대에 모아 흐르는 물에 대충 씻고, 테이크아웃 물품과 음료 제조에 필요한 재료들도 채웠습니다. 화장실 청소는 귀찮아서 생략하고, 행주 살균도 건너뛰었지요.
서진이 생각하기에 혼자 일해서 좋은 점은 눈치 보거나 간섭받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장은 여러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서진이 일하는 매장에는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정도였습니다. 퇴근 5분 전, 서진은 노트북 자판을 빠른 속도로 두드리고 있는 젊은 손님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손님, 매장 문 닫을 시간입니다.”
“아, 죄송한데 십 분만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이걸 꼭 끝내야 하거든요.”
서진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손님에게 알겠다고는 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2
“안녕하세요! 앞으로 두 달간 일하게 된 김성찬입니다.”
“카페 일은 해봤어요?”
“아뇨,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도 참, 이왕이면 경력자를 뽑지. 일일이 가르쳐주려면 피곤하겠네.’
성찬은 미국 유학 중인데 방학이라 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일하는 게 기대된다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순 햇병아리네.’
“편하게 형이라 불러. 이건 음료 제조법이니 암기하고.”
서진으로부터 음료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받아 든 성찬의 눈이 커졌습니다.
“우아, 이걸 다 외우신 거예요?”
“그냥 여기 적힌 대로 대충 하다 보면 금방 외워져. 아, 어제 내가 쓰레기통을 못 씻었는데 그것 좀 씻을래?”
“네!”
성찬은 서진이 시키는 일을 곧잘 했습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큰 소리로 웃으며 인사했고, 할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없는지 먼저 물었습니다. 음료 제조법도 며칠 만에 완벽하게 암기했지요. 성찬이 손님에게 친절히 응대해서인지, 서진은 카페를 찾는 손님이 평소보다 많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카페라테가 뭔가요?”
흰머리가 성성한 어르신이 벽에 걸린 메뉴판을 한참 바라보더니 물었습니다.
“에스프레소, 아니 커피랑 우유 섞은 거예요.”
서진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르신이 고개를 갸웃하자, 성찬이 덧붙여 말했습니다.
“쌉싸름한 커피에 따뜻한 우유 거품을 섞어 부드럽게 마실 수 있는 음료예요. 고소한 맛이 나는데, 단것 좋아하시면 시럽을 추가해 드릴게요.”
“음, 그거 한 잔 줘봐요.”
어르신이 흡족한 듯 지갑을 열었습니다. 성찬은 스팀기로 우유 거품을 만들어 에스프레소 위에 조금씩 부으며 하트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서툰 탓에 하트 모양이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성찬은 실패한 카페라테를 버리고 다시 커피를 내려 우유 거품을 냈습니다.
“야, 그냥 대충 해. 어차피 실패해도 모를 텐데.”
“에이, 그럴 수 없죠. 생전 처음 드시는 카페라테인데, 예쁘게 만들어 드려야죠.”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왜 저리 오래 죽치고 있는 거야. 벌써 몇 시간째인지.”
“할 얘기가 많은가 봐요. 그래도 카페에 빈자리가 많은 것보다는 어느 정도 손님이 있는 게 새로 들어오는 손님들한테도 편하지 않을까요?”
성찬의 말에 서진이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3
성찬이 바닥을 얼마나 힘주어 닦았는지 광이 날 정도였습니다.

“네 집도 아닌데 뭣 하러 아침부터 힘을 빼냐.”
“전 식당이나 카페 바닥이 깨끗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희한한 녀석이네. 누가 보면 네가 카페 주인인 줄 알겠다!”
“헤헤, 주인은 아니고요. 실은….”
그때,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카페 문을 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김성찬. 오랜만이다!”
“휴가 나오는 길이야?”
“그래, 너 보려고 곧장 여기로 왔다.”
“감개무량하네.”
“어디, 카페 사장 아들이 내려주는 커피 한번 먹어보자.”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사장님 아들이라고?’
서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습니다. 성찬은 친구와 테이블에 앉아 즐겁게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장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습니다. 성찬이 허드렛일이라도 즐겁게 하고 손님을 진심으로 대하던 모습들이 서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걸핏하면 투덜대고 성찬에게도 대충 하라며 부추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 해고되는 거 아냐?’
카페 밖까지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온 성찬이 서진에게 말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친구가 찾아온 바람에 기회를 놓쳤네요.”
“어,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지, 뭐.”
“아버지가 형 칭찬 많이 하셨어요. 카페를 믿고 맡길 수 있다고요.”
“내가 뭘 했다고….”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넌 아버지가 부자인데, 왜 굳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한국 왔으면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그야, 아버지가 학비 보내주시니까 저도 뭔가 도리는 해야죠. 마침 매장에서 일할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고 하시길래 제가 방학 동안이라도 하겠다고 했어요.”
성찬의 말에 서진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대도시로 나와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방학이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여행하고 취미를 즐기느라 바빴지, 부모님을 돕거나 좋은 것을 해드린 적은 없었습니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 없다는 부모님의 말에 익숙해져, 보답할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문득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진은 다가오는 쉬는 날에 친구와 자전거로 하이킹하려던 계획을 바꿔 모처럼 부모님 댁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카페라테를 가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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