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네 여행 가방


#1 현실적인 아내, 감성적인 남편

“여보! 나 왔어. 우리 수아 어디 있나?”

해외 출장을 다녀온 민준이 여행 가방을 억지로 끌며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걸로 보아 아내 시연은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듯했습니다. 퇴근한 민준이 현관을 들어서면 수아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마치 환영 인사로 들려 슬며시 웃음 짓곤 했는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만 들릴 뿐 수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며칠 떨어져 지낸 아빠를 보면 필시 반달눈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민준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터였습니다. 그런데 민준의 귀에 들려온 건 웃음이 아닌 울음소리였습니다.

“으아앙!”

놀란 민준이 다급하게 신발을 벗었습니다. 울음소리가 나는 방으로 달려가니 아내가 수아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어디 다쳤어, 응?”

수아는 제 머리를 감쌌습니다.

“머리? 머리를 어디에 부딪혔어?”

엄마의 채근에 수아는 서럽게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애가 울고 있는데 그런 걸 물으면 어떡하니. 수아야, 이리 와. 아빠가 안아줄게.”

민준이 아이를 품에 안고 “괜찮아, 괜찮아” 하며 등을 토닥였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금세 잦아들었습니다. 종일 아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인데, 이럴 땐 남편이 육아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시연은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어디 부딪혔는지 알아야 또 안 부딪히게 하지….”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가는 민준의 등에 대고 해명해 봐야 상황은 이미 민준의 승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주방으로 가 식탁을 차렸습니다.

“출장은 어땠어?”
“응, 일은 잘됐어. 수아 선물로 공주님 헤어밴드 사 왔는데, 이것 봐. 예쁘지?”
“역시 자기답다. 내 건?”
“당신 것도 있지. 짜잔, 수아 거랑 같은 헤어밴드! 어른 사이즈도 있더라고.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수아가 공주님이면 당신은 왕비님인가? 하하하.”
“나더러 그걸 하고 다니라고?”
“집에서만 하면 되지.”

커다란 리본이 포인트인 한 쌍의 헤어밴드를 보며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민준의 모습에, 시연은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시연은 민준의 자상함에 반해 결혼했지만, 가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민준이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연이 사리를 분별해 논리적으로 조언하면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을 뿐이었지요. 그렇게 쌓이고 쌓인 시연의 답답한 마음에 불을 지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 여행 가방 사건

다음 날,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매던 민준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습니다.

“아, 여행 가방 바퀴가 빠져서 출장 다녀올 때 애먹었어.”
“그럼 버려야지.”
“버리긴, 거기에 우리의 추억이 얼마나 많은데…. 기억나? 처음으로 같이 해외여행 갔을 때, 공항에서 여행 가방이 분실돼 발을 동동 굴렀잖아. 당신은 식욕까지 잃고 말야. 여행을 망치는가 했는데 얼마 후에 찾았다고 연락 와서 얼싸안고 기뻐했잖아. 그때 가방도 가방이지만 당신 안심시키느라 힘들었어.”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 통째로 없어졌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이 집으로 이사했을 때, 새로 주문한 식탁이 늦게 배송되는 바람에 며칠 동안 여행 가방을 식탁 삼아 밥 먹었잖아. 캠핑 온 기분이라며 웃고 떠들다가, 나중에는 이왕 기분 내는 거 확실하게 하자면서 코펠에다 음식 담아서 먹었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지.”
“그러니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 꾸러미라구. 그뿐이야? 수아를 가방 위에 태워서 이리저리 끌어주면 얼마나 좋아하는데!”

민준이 여행 가방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자, 시연도 잊고 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럼 제품 보증 기간이 남았으니 수리 요청해 봐.”
“응, 점심시간에 고객센터에 전화하고 택배로 보낼게.”

민준은 출근길에 빈 여행 가방을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일을 끝내고 돌아온 민준의 손에 여전히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습니다.

“수리 요청 안 했어?”
“고객센터에 전화했더니 단종된 제품이라 수리가 안 된대.”
“그래서?”
“고장 난 제품을 보내주면 비슷한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겠대.”
“그런데 왜 안 보냈어?”
“보상을 포기하겠다고 했지.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가방이라 보내줄 수 없다고.”
“뭐? 새걸 준다는데 왜 마다해?”
“이걸 어떻게 보내니? 새 제품 열 개를 준다 해도 절대 안 바꿔.”
“추억은 새 가방하고 또 만들면 되지. 그깟 추억이 뭐 대수라고….”
“그깟 추억이라니. 너는 왜 그렇게 매정해?”
“아니,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어느 쪽이 우리한테 더 유리한지.”
“늘 이익만 따지며 살 수는 없지. 새 가방은 얼마든지 돈 주고 살 수 있지만, 이 가방은 세상에 하나뿐이잖아.”

시연은 남편의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말이 더 길어졌다가는 다툼으로 이어질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3 생각지 못한 좋은 일

시연은 여행 가방을 보면 속이 부글거리는 듯해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곳에 두었습니다. 남편이 여행 가방과 관련한 추억을 풀어냈을 때 가방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는 했어도, 고장 난 가방을 간직하기 위해 새 가방 얻을 기회를 포기하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품의 하자나 파손에 대해 보증받을 수 있는 기간이고, 제품을 판매한 회사에서 수리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므로 그 권리를 마다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여행 가방을 새로 마련해야 하기에, 지출하지 않아도 될 비용이 나간다고 생각하니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날 퇴근한 민준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 가방 회사 고객센터에서 전화 왔어.”
“왜?”
“나랑 통화한 상담사가, 나 같은 고객은 드물다며 상담 내용을 상사한테 따로 보고했대.”
“그래서?”

민준을 바라보는 시연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조치할 적절한 방안에 대해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회의 결과 파손된 부분을 휴대폰으로 찍어 보내주면 새 제품을 보내주기로 했대. 자사 제품에 애정을 가져준 데 대한 보답이라면서 말야.”
“정말?”
“응, 잘됐지?”
“당신 말대로 하니 좋은 일이 생겼네. 추억이 담긴 가방을 지키고 새 가방도 얻었으니, 결국 우리 두 사람이 원하는 게 다 이뤄진 거잖아.”
“사실 당신과 상의 없이 내 뜻대로 결정한 것 같아 미안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야. 앞으로 당신 의견도 존중할게.”
“나도 당신 마음 알아주지 않고 말을 심하게 해서 미안했어.”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습니다. 그때 수아가 소파에 앉은 엄마 아빠를 향해 뒤뚱뒤뚱 달려왔습니다. 민준은 수아가 탁자 모서리에 부딪힐세라 재빨리 탁자 앞으로 몸을 움직여 수아를 안았습니다.

“아, 다가오는 휴일에 집에 있는 가구 모서리랑 문틀에 폭신한 보호대를 붙이려고 해. 수아가 부딪혀도 아프지 않게.”
“안 그래도 부탁하려고 했는데, 고마워.”
“출장 갔다 돌아오던 날 당신이 수아한테 어디 부딪혔냐고 물어보던 게 문득 생각나더라고. 아파서 우는 애 달랠 생각만 했지, 보호대 붙일 생각은 왜 진작 못 했는지.”
“지금이라도 붙이면 되지.”
“수아야, 아빠가 늦게 생각해서 미안해.”

민준이 수아를 안은 팔을 위로 쭉 뻗어 올리자, 수아가 반달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화답했습니다. 세 식구의 웃는 눈매가 꼭 닮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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