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가 최근에 새로 지어진 곳이라 시설이 참 좋아요. 마음 넓고 푸근한 어르신들이 많아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사회복지사의 말에 건성으로 답하면서 고 씨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지팡이를 짚거나 부축을 받으며 걷는 노인들이 보였습니다. 로비 중앙에 걸린 ‘△△양로원’이라는 현판을 보며 고 씨가 옅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양로원에 들어가시면 어때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의 말에 고 씨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착잡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력도 쇠하고 자신도 바빠 자주 찾아올 수 없으니 전문시설의 도움을 받으면 좋지 않겠느냐며 양로원 팸플릿을 보여주었습니다. 위치도 좋고, 프로그램이나 식사 등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도 높다고 설득하는 아들의 건조한 말투에 고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고 씨가 동의하자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고 씨를 양로원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시간 될 때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쌩하고 가버렸습니다.
고 씨는 그간의 삶을 떠올렸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일찍 승진한 그는 외국을 오가며 거액의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동기들은 잘나가는 그를 부러워했고, 스스로도 성공한 삶이라 자부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 들고 힘이 없어 양로원에서 홀로 여생을 보내게 되다니, 새삼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져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새로운 룸메이트 고진영 어르신이세요. 서로 인사 나누세요!”
고 씨를 방으로 안내한 복지사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복지사는 고 씨에게 인사하는 노인들을 한 명씩 가리켰습니다.
“여기는 장병덕 할아버지. 우리 양로원 최고참이시라, 모르는 것 있으시면 다 물어보셔요. 그리고 이분은 최고 입담꾼 유규식 할아버지세요.”
“한방에 살게 된 것도 인연이니, 가족같이 잘 지내봅시더.”
유 씨가 손을 내밀자 고 씨가 얼떨결에 악수에 응했습니다. 고 씨가 짐을 푸는 동안, 유 씨는 고 씨의 가방에서 나온 영어 원서, 반듯한 셔츠, 커피 그라인더 등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 두꺼운 책은 뭡니까? 아이고야, 꼬부랑글씨가 천지네. 영어 잘하는 갑네예.”
“별거 아닙니다.”
“대단하네예. 내는 국민학교도 간신히 나와서 꼬부랑대는 글은 하나도 못 읽는다 아입니까. 옷도 깔끔하게 싹 걸어 놓으시고. 멋쟁이네예!”
유 씨는 껄껄 웃으며 고 씨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고 씨가 얼굴을 찡그리며 언짢은 내색을 했지만, 유 씨는 그 후로도 어디에 살았냐, 자식은 몇이냐, 퇴직 전에는 무슨 일을 했냐 등등을 캐물었습니다. 고 씨가 적당히 대꾸하며 대화를 끊으려 해도 한 마디에 열 마디를 덧붙이며 말을 이어갔지요.
‘앞으로 피곤하겠군.’
“그거는 뭡니까?”
유 씨가 둥근 철제 케이스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머리 손질할 때 바르는 포마드입니다.”
“포, 뭐요? 아, 머리에 바르는 머릿기름입니까! 내는 평생 그런 거 발라본 적이 없는데, 어디 한번 봐도 됩니까?”
“안 됩니다.”
고 씨는 포마드를 서랍장에 홱 넣었습니다. 유 씨는 내밀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습니다.
“아, 예…. 초면에 실례했네예. 미안합니더.”
“여기 옥상정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우리 장 씨가 안내해 드릴 낍니다. 같이 가이소.”
“그려유. 같이 가셔유.”
유 씨의 말에 장 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앞장섰습니다.
“유 씨 땜에 정신 없으시쥬? 처음에는 쪼까 대근할 수도 있는디, 적응되실 텐께 너무 심란해 마셔유.”
“그러길 바라야겠군요.”
장 씨의 말에 고 씨가 차갑게 대답했습니다. 이후로 고 씨는 유 씨를 경계하며 사적인 대화는 피했습니다. 유 씨는 고 씨에게 궁금한 게 많은 듯 기회만 되면 말을 걸었지만, 고 씨의 냉담한 반응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적막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 씨가 화창한 햇살 아래서 책을 볼 요량으로 커피를 고르던 때였습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와,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였지요.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오야, 왔나?”
유 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반겼습니다.
“우리 준서도 왔어요. 자, 증조할아버지께 인사드리자.”
“아이고야, 우리 강생이 아이가!”
유 씨의 손자인 아기 아빠가 아기를 유 씨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유 씨는 옹알이를 하는 아기의 코를 간지럽혔습니다.
“그새 이리 마이 컸나? 얼라들 크는 거 금방이다, 맞제?”
“네. 얼마 전까지 뒤집기만 했는데, 이제 기어다니니까요.”
“보내준 영상 보니까 야가 운동 신경이 좋은지 기는 속도가 남다르더만. 내 닮은 거 아이가?”
유 씨가 허허 웃었습니다. 그사이 유 씨네 아들 부부는 복지사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네, 좀 전에 먹었습니다.”
“그럼 이것 좀 드세요. 요새 참다래가 제철이라 맛있더라고요.”
“오실 때마다 저희까지 챙겨주시고…. 늘 감사합니다.”
유 씨의 며느리가 건네는 과일을 받으며 복지사가 말했습니다. 유 씨의 아들도 장 씨에게 다가가 과일을 건넸습니다.
“어르신, 허리는 좀 괜찮으세요?”
“좀 나아졌어. 근디 자네 아부지가 맨날 시끄럽게 해서 정신이 없어. 조용히 좀 시켜 봐.”
유 씨의 아들은 장 씨의 너스레를 정답게 웃어넘기고는 고 씨에게 다가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것 좀 드세요.”
고 씨는 유 씨의 아들이 주는 과일 접시를 받아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유 씨 가족은 사흘이 멀다 하고 양로원을 드나들었습니다. 아들 내외가 다녀간 며칠 뒤에는 딸 내외와 손녀가, 그다음 번에는 막내아들 내외가 찾아왔지요.
하나같이 밝고 살뜰한 유 씨의 가족을 보고, 고 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를 양로원에 데려다주고 떠나던 아들의 무심한 모습은 자신의 삶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 날 야망을 품고 앞만 보며 달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었습니다. 가족은 성공을 이룬 뒤에 돌봐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밖으로 돌기만 하는 그의 자리는 가정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점점 멀어졌고, 마주하면 서먹했습니다.
고 씨는 유 씨의 가족을 볼 때마다 자신의 아픈 부위가 건드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식들과 가까이 지내며 허물없이 대하는 유 씨가 부러웠지요.
“우리 막내가 사온 떡이다. 먹어 봐라.”
“방금 밥 먹었잖어. 배불러.”
“으이? 떡보가 떡을 마다해?”
유 씨가 장 씨의 얼굴 앞으로 떡을 휘휘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고 씨 눈에는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이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습니다. 그동안 유 씨를 무시했던 것이 괜스레 미안했습니다.
‘어쩌면…. 유 씨야말로 진정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고 영감님! 이거 하나 드셔보실랍니까?”
허공을 응시하는 고 씨에게 유 씨가 떡을 건네며 물었습니다. 머뭇거리다 떡을 받은 고 씨가 문득 유 씨에게 말했습니다.
“제 머릿기름, 한번 써보시겠습니까?”
“예? 포 머시기 말입니까? 괜찮습니더. 촌놈이 머리에 힘 준다고 뭐 달라집니까.”
고 씨는 서랍에서 포마드를 꺼내 건넸습니다. 유 씨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자제분들 올 때 멋있게 보이면 좋으니까요. 손바닥에 천천히 녹여 머리에 바르면 됩니다. 하다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십시오.”
고 씨는 헛기침을 하고는 방을 나갔습니다. 닫히는 방문 사이로 유 씨의 들뜬 목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그럼 머리에 힘 좀 줘보까? 장 씨야, 함 봐라. 요래 바르면 되겠나?”
“머리카락이나 많으면 모를까, 무슨 소용이라고 그려?”
등 뒤에서 들리는 두 노인의 말소리에, 고 씨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습니다.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