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엄마, 내일 병원 가는 거 알죠?”
선예가 탁상달력을 만지작거리며 휴대폰에 대고 말했습니다.
“벌써 내일이야? 근데 예약 시간을 좀 앞당길 수 있나?”
“큰 병원이라 변경이 쉽지 않을 텐데, 왜요?”
“볕 좋을 때 고추 널어야 해서.”
“에이, 낼모레 해요.”
“그래야지, 뭐.”
양촌댁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는데도 양촌댁은 밭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이제 그만 쉬라며 만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악착같이 모종을 심고 수확해 자식들 집에 보내주었지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은 인근 도시에 사는 선예가 담당했습니다. 오 남매 중 다른 형제들보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살기에 엄마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자연스레 선예가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양촌댁! 여긴 어쩐 일이우?”
“서정댁도 이 병원 다니오? 나는 무릎이 안 좋아서 매달 주사 맞으러 와.”
병원을 찾은 선예와 양촌댁이 접수를 마치고 진료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건넛마을 사람이 양촌댁에게 알은체를 했습니다. 양촌댁도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방석남 님!”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양촌댁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다음 차례이니 준비해 주세요.”
“예.”
“양촌댁 이름이 석남이었수?”
“그러고 보니 여태껏 서로 이름도 몰랐네, 허허. 나 위로 죄다 딸이어서 우리 아부지가 기필코 아들 낳을라고 나 태어나기 전에 사내 이름으로 지어 놓았다네.”
“그땐 그랬지. 평생 불릴 이름을 되는대로 지었으니….”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간호사가 재차 호명하자 양촌댁이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서정댁에게 손을 흔들며 진료실로 갔습니다.
“그동안 좀 어떠셨어요?”
“주사 맞고 가면 한동안 괜찮은데, 시간이 지나면 똑같으우.”
“요즘도 밭일 많이 하세요?”
“놀면 뭐 하요. 몸을 놀려야 땅이 주는 걸 얻지 않소. 자식들한테도 보내주고.”
“엄마는 참, 우리는 괜찮다고 몇 번을 얘기해요. 엄마가 쉬는 게 우리 맘 편하게 도와주는 거라고.”
선예가 의사와 엄마의 대화에 껴들며 농담과 불만이 섞인 투로 말했습니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인공관절 수술도 고려해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셔요.”
#2
“의사 선생님 말씀 들었지, 엄마?”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 안에서 선예가 다시 한번 당부했습니다. 양촌댁은 말없이 약 봉투를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선예가 한마디 더 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순자, 아니 채원아. 나 지금 운전 중이야. 이따 전화할게.”
선예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습니다.
“휴대폰에 이름을 바꾼다는 걸 깜박했네.”
“순자는 네 중학교 때 친구 아니냐? 그런데 채원이는 누군고?”
“순자가 얼마 전에 개명을 했거든, 채원이로. 자기 이름이 촌스럽다면서 예전부터 바꾸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개명했지 뭐야. 근데 이름을 바꿔 부르려니 입에 잘 안 붙네.”
“하긴, 요즘은 개명하기 쉽다드라. 예쁜 이름으로 잘 바꿨네. 부럽다.”
“왜, 엄마도 개명하고 싶어?”
“나도 이참에 바꿔볼까?”
뜻 없이 한 말에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자, 선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응? 진심이야? 어떤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데?”
“희연, 방희연.”
양촌댁은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머, 이름까지 바로 나오는 걸 보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언제부터 생각했던 거야?”
“계속 생각한 건 아니고. 텔레비전에서 내 또래의 고상하게 생긴 어느 화가를 봤는데, 이름이 희연이드라고. 그 여자가 그린 그림이 어찌나 멋있든지. 화면으로 봐도 대단한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 싶드라. 그래서 이름도 안 잊혔지.”
“어떤 그림이었는데?”
“탁 트인 바다에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그림. 동백꽃이었나.”
“엄마가 그림에 관심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가 달력에 있는 그림들을 오려서 집 안 곳곳에 붙여 놓았는데, 그동안 나는 예사로 봤네.”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가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고 그래. 그런 기분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게 어떨 때는 아까워. 그래서 오려다가 벽에 붙여놓고 오며 가며 들여다봐. 허허.”
선예는 엄마에게 그런 감성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논일과 밭일로 그을린 얼굴에 굵은 손마디만 보았지, 거친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마음을 헤아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무심결에 엄마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외면했을 리 없으니까요.
‘나도 참 무심했네. 그동안 뭘 한 거지?’
가까이 살면서 엄마가 편찮으면 병원에 모셔다드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드리는 것으로 형제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선예였습니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안 순간, 부끄러워 엄마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3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저만치 달아나는 햇살 좋은 오후, 양촌댁은 읍사무소를 나서며 주민등록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새로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에는 ‘방희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몇 달 전, 선예는 엄마가 말했던 이름을 흘려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개명에 대한 엄마의 의중을 다시 물었을 때, 엄마는 석남이라는 이름에 미련이 없는 듯했고 그 이름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여한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저 실행에 옮기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덮어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마음을 살피니 답이 나왔습니다. 선예는 곧장 엄마의 개명에 앞장섰습니다.
“기분이 어때, 엄마?”
“새로 태어난 것 같지, 뭘. 이 나이에 개명하게 될 줄은 몰랐네, 허허.”
“내가 진즉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이 들어서는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지만, 어릴 적에는 석남이로 불리는 게 왜 그리 싫던지. 사내 이름 같고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아서 누구한테 이름 말할 때마다 영 민망했으니.”
“그랬구나….”
“그래도 석남이로 살면서 제일 잘했다 싶은 거는 너희 오 남매 얻은 거. 내가 석남이로 안 살고 다른 이름으로 살았어도 너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싶다.”
“우리가 엄마 자식들인데, 이름 다르다고 딴 데서 태어났을라고.”
“그러네, 허허.”
양촌댁은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선예는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에 시동을 걸어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확인한 선예는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내어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거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쭉 펴고 주무르는 엄마에게 손에 든 것을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냐?”
“이름 바꾼 기념으로 주는 선물!”
양촌댁은 선예가 주는 종이가방을 받아 그 안에 든 것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스케치북, 붓, 물감, 팔레트 등 그림 도구였습니다. 양촌댁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개명도 했으니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야지. 엄마, 밭일은 적당히 하고 엄마 그리고 싶은 거 마음껏 그려요. 다 쓰면 또 사 줄 테니까. 그리고 나랑 같이 미술전도 구경 다녀요.”
“아이고….”
양촌댁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눈은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이윽고 눈은 반달이 되고 입꼬리는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이 선예의 눈동자에 마치 그림처럼 다가왔습니다. 선예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늦게나마 원하는 이름을 갖게 된 엄마의 삶 역시 이제는 하고 싶은 일들로 채워지기를. 하루하루가 수채화처럼 곱게 채색되기를.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