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와 호이


#1

“어이쿠!”

나무에 기대 낮잠을 자던 레서판다 호이가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건너편에서 낙엽 더미를 밟고 넘어진 너구리 할아버지가 허리를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도저히 일어나질 못하겠구먼.”

호이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습니다. 얼마 후, 누군가 호이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오늘 호숫가에서 플라밍고 발레 공연이 열린대. 우리 같이 보러 가자.”

레미의 성화에 호이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말했습니다.

“난 안 갈래. 다른 동물들이랑 어울리고 싶지 않아.”
“나랑 같이 있으면 되지. 멋진 공연을 보면 기분도 한결 좋아질걸?”

레서판다 레미는 숲속 이웃들에게 언제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도움이 필요한 동물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갑니다. 새 둥지가 망가지면 가지를 주워주고, 두더지가 미끄러지면 손을 내밀지요. 하지만 호이는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동물들이 낯설고 불편했습니다.

“난 너랑 가고 싶은데….”

레미가 호이의 두 손을 쥐며 재차 졸랐습니다.

“그럼 발레 공연만 보고 오는 거야.”

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레미 뒤를 따랐습니다. 굴참나무가 무성히 늘어선 길목을 지날 때였습니다. 도토리를 주머니 한가득 담아 끌고 가는 다람쥐 티로를 만났습니다. 반가움에 입꼬리가 올라간 레미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 도토리를 많이 주웠구나?”
“응, 가족에게 맛있는 도토리 요리를 만들어 주려고.”

그때 도토리 주머니가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터진 구멍으로 도토리가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아, 안 돼.”

울상이 된 티로가 구멍이 뚫린 부분을 차풀로 질끈 묶고는 도토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습니다. 레미가 후다닥 티로에게 다가갔습니다.

“같이 줍자.”
“호이랑 어디 가던 길 아니야? 나 혼자 천천히 주워도 돼.”
“괜찮아, 아직 여유 있어.”

어색하게 서 있던 호이도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레미를 따라 도토리를 주웠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건 견과류로 만든 쿠키야. 하나씩 먹어.”
“우와, 먹음직스럽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인데 잘 먹을게.”

레미가 두 귀를 쫑긋거리며 쿠키를 한 입 베어 먹었습니다.



#2

레미와 호이가 울창한 숲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깃털의 유황앵무새 루비가 나뭇가지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앵무새 살려!”
“어머, 루비 아니니? 어떻게 된 일이야?”
“날면서 한눈을 팔다가 그만 나뭇가지 틈에 끼이고 말았어.”
“저런, 조금만 있어봐.”

레미가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에 걸려 바둥거리는 루비를 구해 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워.”
“예쁜 날개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

곁에서 지켜보던 호이가 팔짱을 낀 채 말했습니다.

“레미, 이러다 공연에 늦겠다.”
“아, 늦으면 안 되지. 얼른 가자.”

레미가 호이를 다독이며 서둘러 발걸음을 뗐습니다. 숲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자 통나무 다리가 놓여있었습니다. 통나무 다리를 살금살금 건너던 중 호이가 그만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렸습니다. 레미가 재빨리 호이의 팔을 잡았습니다.

“조심해!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따라와.”
“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통나무 다리를 건너 계곡 건너편으로 가자, 반달가슴곰 바롬이 바위틈 앞에서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바롬은 레미와 호이를 보며 말했습니다.

“꿀단지가 바위 깊숙이 들어가 버렸어.”
“그럴 땐 도구가 필요하지.”

레미가 주위를 살피더니 긴 나뭇가지를 주워왔습니다. 그러고는 바위틈으로 쑥 넣어 꿀단지를 꺼내주었습니다.

“고마워. 하마터면 점심을 못 먹을 뻔했어. 그런데 어디 가던 길이야?”
“플라밍고 발레 공연을 보러 가는 중이야. 호숫가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여기서 어디로 가면 돼?”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은방울꽃 군락이 나타날 거야.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호수가 보여.”
“알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레미가 줄무늬 꼬리를 움직이며 바롬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3

“공연 너무 멋졌어. 플라밍고들의 긴 다리가 발레 동작을 더 우아하게 만드는 것 같아. 호이 너는 어땠어?”
“뭐, 그럭저럭 볼만했어.”
“그럼 다음에 또 보러 오자.”

레미가 마치 발레 동작을 하듯 사뿐사뿐 걸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 둘은 또다시 통나무 다리 위에 섰습니다.

“호이, 조심해. 아까처럼 중심 잃지 말고.”
“으악!”

레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이가 그만 계곡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레미가 손을 뻗었지만, 호이는 급한 물살에 손쓸 틈도 없이 계곡 아래로 떠내려갔습니다. 물살이 약해진 곳에 이르러 호이는 큰 바위 사이에 걸려 멈췄습니다. 계곡을 따라 달려오던 레미가 호이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와주세요! 레서판다가 물에 빠졌어요!”

나무 꼭대기에서 졸고 있던 유황앵무새 루비가 레미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날아가 다른 동물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다람쥐 티로는 튼튼한 넝쿨 줄기를 앞니로 끊어 나무에 묶은 뒤, 호이가 잡을 수 있도록 던져주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반달가슴곰 바롬은 줄기를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계곡을 빠져나오고 있는 호이를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호이가 체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나뭇잎과 따뜻한 차를 가져왔지요.

“정말 고마워. 다들 도와줘서 호이가 무사할 수 있었어.”

덜덜 떨고 있는 호이를 대신해 레미가 말했습니다.

“호이가 많이 놀랐나 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계곡에 통나무를 하나 더 놓아야겠어.”

호이는 차가운 계곡물에 젖은 몸이 한기로 후들거렸지만 마음에는 따뜻한 기운이 퍼졌습니다.



며칠 뒤, 레미를 만나러 가던 호이가 뒤쪽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이쿠!”

너구리 할아버지가 진흙을 밟고 미끄러진 채 넘어져 있었습니다. 호이는 주저 없이 너구리 할아버지에게 달려갔습니다.

“괜찮으세요? 제 팔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아이고, 고맙네. 참 다정한 레서판다로구먼.”

낯선 인사말을 들은 호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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