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예요?”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 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20여 년 전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학교 입학식 전날, 기숙사에서 개강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네 아버지랑 입학식 보러 왔다. 학교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늦지 않게 갈게.”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부푼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저는 모진 말을 내뱉었습니다.
“아니, 다 큰 아들 입학식에 왜 와요? 다른 부모님은 아무도 안 와요. 창피하니까 오지 마세요. 절대로 오지 마세요.”
저는 오지 말라는 당부를 여러 번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은 다음 날 학교 정문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순간 화가 났습니다. 저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기어코 오신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사람들 앞에서 부모님을 무안하게 해드렸습니다. 완강한 제 모습에 결국 두 분은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안도감도 잠시,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습니다.
자식 넷 중 장남인 저는 부모님의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수도권에 가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며 땅과 소를 팔아 농사를 정리하고 성남에 여섯 가족이 살 아담한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동안 농사일만 해온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 나가 막노동일을, 어머니는 건물 청소든 식당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셨습니다. 수험생은 체력이 중요하다며 먹고 싶은 것 다 챙겨주시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고된 노동으로 앓아누우시면서도 부모님은 오직 자식들 뒷바라지만 생각하셨습니다.
부모님의 고생을 알기에 저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지방에 있는 유명 국립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고생했다. 우리 가문의 영광이다” 하며 눈물 흘리실 만큼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습니다. 동네방네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으셨고, 제가 짐을 챙겨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날 없이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저의 대학교 입학식은 부모님에게 있어서 단순한 입학식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이 뙤약볕에 살갗을 그을려 가며 수천수만 번 허리 숙여 일군 땅에서 수확한 알곡이 저였습니다. 건축 현장에서 벽돌 짐 지고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쌓아 올린 건물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런 저의 대학 입학식은 부모님 인생에서 가장 값진 보람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전화했습니다.
“걱정 말아라. 잘 들어왔다. 혼자 생활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우리는 네가 번듯한 대학교에 들어가 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
저는 끝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에 자리를 잡았을 때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이렇게나 고된데, 부모님은 네 명의 자식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부모님이 하신 고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활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보니 부모님께서 왜 하시던 농사일까지 정리해 가며 자식들 교육에 열을 올리셨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자식들만큼은 당신들처럼 힘든 일 하지 않고 살길 바라셨던 것이겠지요.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대학교 입학식 날 부모님께 모질게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한 일이라고 고백하자, 제게 질문한 분이 말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그때 죄송했다고 말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