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퇴근길에 바나나우유를 사 왔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가끔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애들 고기 먹게 외식 좀 시켜줘요” 하면 “셋이 먹고 와” 하며 전화를 뚝 끊어버릴 정도로 무뚝뚝한 남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속상한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이들 먹으라고 과자, 호떡, 아이스크림 등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 오곤 합니다.
사실, 바나나우유는 아이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유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사 온 거라 다른 말은 못 하고 “골고루 사 오면 좋은데, 애들은 초코우유나 딸기우유 좋아해요” 하며 에둘러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남편이 계속 바나나우유를 사 오는 바람에, 바나나우유는 본의 아니게 늘 제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큰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초코우유가 먹고 싶어요. 다음에는 초코우유 사 오시면 안 돼요?”
저는 다음 날 사주겠노라 하고는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큰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 초코우유 사 오셨죠?” 하며 냉장고로 달려갔습니다.
“어! 미안해. 엄마가 깜빡했네. 지금 네가 가서 사 올래?”
“아니에요. 내일 먹죠, 뭐. 근데 요즘 왜 이렇게 초코우유가 맛있죠?”
아이가 아쉬워하며 방으로 들어간 뒤 아무래도 초코우유를 사 와야겠다 싶어서 나가려는데, 마침 남편이 손에 검정 봉투 하나를 들고 집에 왔습니다. 으레 바나나우유를 사 왔겠거니 하고 봉투를 열었더니, 반갑게도 초코우유가 세 개나 들어 있는 것입니다.
“민석아, 아빠가 너 좋아하는 초코우유 사 오셨네. 어떻게 아셨대? 역시 아빠밖에 없네.”
“진짜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초코우유 완전 좋아하는데, 잘 먹겠습니다!”
전날 아들과 주고받은 대화를 남편이 들었나 봅니다. 아들이 기뻐하자 남편의 입가에도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비록 작은 간식거리이지만 아빠의 소리 없는 사랑을 느끼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아이와, 무뚝뚝하기는 해도 잠잠히 아들을 챙겨주는 남편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뭐죠? 아들 좋아하는 것만 사 오고, 마누라 좋아하는 건 없네요?” 투정 아닌 투정도 부려봤습니다.
그동안 말수도 없고, 마음에 있는 것을 잘 표현하지도 않는 남편을 보며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날마다 새벽 일찍 출근해 밤이면 지친 몸으로 들어와 씻고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상인 남편이 안쓰럽고 가엽게 느껴지다가도, 가끔 아이들과 정답게 이야기도 하고 함께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불만을 품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피곤해 보이는 날이면 되도록 귀찮게 하지 않고 놔두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지요.
남편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저는 마음으로만 소원할 뿐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 같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가족을 사랑해준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남편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며 불평했던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말수도 없고 쑥스러움을 잘 타는 남편은 어쩌면 우리가 먼저 다가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아이들이 먼저 다가갔더라면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요.
초코우유 하나로 다시 한번 가족 간에 사랑을 느끼고 더욱 화목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날 후로, 남편의 퇴근길에는 항상 초코우유가 들려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