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은행 계좌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질병이나 사고, 자녀 교육, 노후 준비 등에 대비해 삶의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다. 통장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심리적·경제적 방어막인 셈이다. 잔고가 넉넉하면 지출이 필요할 때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지만, 잔고가 바닥나면 적은 지출에도 경고등이 켜지고 삶은 팍팍해진다.
인간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통장이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다양한 자원이 오가는 거래의 장이다. 인간관계를 거래라고 표현하면 계산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사이임을 의미한다. 인간관계에서 오가는 자원에는 감정, 노동, 정보, 재화, 물질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감정은 관계의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경영학자 스티븐 커비(Stephen Covey)는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신뢰의 정도를 ‘감정 은행 계좌(Emotional Bank Account)’라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이 계좌의 잔고가 가장 두둑해야 할 대상이 바로 가족이다. 우리는 은행 계좌의 잔고에는 민감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감정 계좌의 잔고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가정의 행복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가족 간의 감정 은행 계좌를 관리하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이느냐에 달렸다.
‘감정 은행 계좌’ 사용법
감정 계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 계좌가 가진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일반 계좌는 본인이 만들지만, 감정 계좌는 상대의 마음에 나의 계좌가 만들어진다. 서로의 마음속에 상대방 명의의 계좌가 개설되는 것이다. 계좌의 잔고는 상대방과 대화하거나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다’, ‘지금은 대면하고 싶지 않다’ 이런 기분이 바로 잔고의 상태를 나타낸다.
예입은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전해 안정감과 신뢰를 쌓는 일이고, 인출은 그 반대다. 흥미로운 점은 감정 계좌가 단순히 좋은 감정의 크기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심은 ‘신뢰’이다. 때로는 불편한 상황이나 갈등이 있더라도 상대가 나를 존중한다는 믿음이 있으면 잔고가 쉽게 바닥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정한 말과 선의를 베풀어도 진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잔고는 늘지 않는다.
감정 계좌는 상대의 마음에 존재하는 만큼 입출금의 주도권도 전적으로 상대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여러 학원을 보내며 예입이라 여기더라도 자녀가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원한다면 예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예입이라고 생각하는 선의를, 상대는 잔소리나 간섭으로 받아들여 인출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주느냐보다 상대가 무엇을 예입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잔고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잔고가 넉넉하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마이너스 상태일 수 있다.
잔고가 적으면 작은 실수조차 큰 싸움의 불씨가 된다. 소소한 부탁에도 “내가 네 심부름꾼이야?”라는 날 선 반응이 돌아오는 까닭은 평소 쌓아둔 신뢰가 부족해 상대의 말과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화가 단절되고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집은 감정 은행 계좌가 마이너스 상태이거나 감정적 파산 상태와 다름없다. 훈훈한 가정을 이루려면 감정 계좌 잔고를 플러스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꾸준한 예입으로 잔고를 든든히
계좌에 입금하지 않고 계속 꺼내 쓰기만 하면 잔고가 줄어들듯, 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만 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감정 통장의 잔고는 바닥난다. 감정 계좌는 한때 잔고가 많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플러스 상태로 유지하려면 정성을 다해 관리해야 한다.
유념할 점은 잔고가 일회성 예입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날에 함께 여행을 가거나 고가의 선물을 해주면 잔고가 한방에 가득 채워질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일 년에 한두 번의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행위로 조금씩 쌓아 나갈 때 잔고가 든든히 형성된다.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는 태도, 수고를 알아주는 말 한마디,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 따뜻한 눈빛으로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경청 등 거창하지는 않아도 마음이 담긴 일상의 태도가 신뢰를 구축한다.
꾸준함이 중요한 이유는 신뢰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 주는 커다란 선물은 일시적인 기쁨을 주지만, 매일 쌓아 나가는 신뢰는 상대에게 ‘언제나 내 편’이라는 확신을 준다. 위기의 순간에 대비하고 싶다면 평소 충분히 저축해 두어야 한다. 가족에게 건넨 작은 배려가 누적되어 훗날 단단한 자산으로 돌아온다.
서로의 잔고가 균형을 이루려면 가끔 결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다. 고마웠던 점과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하며 입금과 출금을 확인함으로 잔고를 점검할 수 있다. 감정 계좌는 상대의 가치 판단에 따라 입출금이 결정되므로 상대가 무엇을 입금으로 느끼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뢰에는 완성이 없다. 사람은 기계처럼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로 관계가 불안해질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에도 끝이 없다.
인출은 예입보다 크고 빠르다
신뢰를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사람의 뇌는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을 훨씬 강하게 각인시키는데, 이를 심리학에서는 ‘부정성 편향’이라 부른다. 열 번의 호의보다 한 번의 상처가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도 이 같은 심리 때문이다. 짜증 섞인 말투, 날카로운 비난,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는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단번에 흔들어 놓는다. 특히 분노를 참지 못하고 쏟아내는 순간 관계는 큰 타격을 입는다.
감정 계좌를 관리하는 데에도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의 값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인출은 예입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가령, 긍정적인 감정이 1000원으로 예입된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5000원으로 인출된다. 사소한 행동이라고 해서 인출 값이 소액이 아니다. 관계에서는 작은 일이 곧 큰 일이다. 열 번 잘해줬으니 한 번쯤은 못해도 괜찮다는 계산은 인간관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처 주지 않고 상대가 싫어할 일을 하지 않는 쪽이 더욱 수지맞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은 일로 감정 계좌를 탕진해 버렸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잔고를 결정한다. 변명하거나 회피하면 인출이 늘어나 마이너스 통장이 되고 만다.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태도, 책임 있는 행동, 진심 어린 사과는 오히려 예입 효과를 가져온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 한마디가 텅 빈 계좌를 다시 채우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상대에게 잘해준 적이 더 많은데 상대가 서운한 일을 크게 기억하면 속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 역시 본능적으로 같은 심리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소 신뢰했던 사람의 감정 계좌에 인출이 발생했을 때, 부정성 편향에 빠져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려 해석하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자. 그러한 편향을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렵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덜 매몰되어 감정 계좌 관리에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일반 계좌의 잔고는 우리를 편리하게 하고, 감정 계좌의 잔고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어디에 사느냐’와 ‘어떻게 사느냐’의 차이인 셈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각각 가진 계좌들의 잔고를 모두 합친 결과가 그 가정의 총자산을 이룬다. 가족 간의 감정 통장이 넉넉하면 우리는 어떠한 시련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대의 호의를 기본값으로 여기고 자신의 무례는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감정 은행 계좌는 서로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고 관대하게 대할 때 넉넉해진다. 예입은 조금씩 매일, 인출에는 민감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사람들은 가정을 행복하게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감정 은행 계좌는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감정 계좌처럼, 사랑은 부단한 노력과 의식적인 선택으로 보전된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꾸준히 가꿔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스스로 질문해 보자.
‘나는 오늘 가족의 마음에 무엇을 얼마나 저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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