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니스 코트 위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공중으로 높이 뜬 공을 네트 너머로 강하게 내리꽂는 ‘스매싱(Smashing)’ 장면일 것이다. 상대가 손쓸 틈을 주지 않는 스매싱은 경기를 끝내는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한 방이다. 그런데 이런 스매싱이, 경기장 아닌 대화의 장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종종 가족을 향해 말로 스매싱을 날리곤 한다. “내 친구들을 초대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 “너 영어 성적이 안 나와서 학원에 등록했어”, “당신 안 쓰는 물건들 다 버렸어”, “부모님께 주말에 간다고 했어”…. 이러한 느닷없는 통보가 바로 스매싱 화법이다.
일정 계획, 집안일 분담,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가정에는 가족 간에 공동으로 선택하고 결정 내려야 할 대소사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럴 때 충분히 상의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결과만 툭 던져버리는 식의 화법을 사용하면 나머지 가족은 당황한다. “왜 의논 없이 마음대로 결정했어?”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당연한 순서다. 통보식 화법은 속도와 통제가 중요한 수직적 조직에 어울리는 소통 방식이다. 가정에서는 통보가 아닌 의논과 타협을 택해야 한다. 가정은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의 감정을 보호하며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통보의 함정: 쉽고 빠르다
가족 간 갈등은 반드시 의견이 달라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같은 의견을 갖고도 결론에 이르는 과정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좋은 결론이라도 통보식으로 전달하면 상대방의 반발을 사기 십상이다. 일방적인 통보가 정보 전달은 명확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듣는 이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것이다.
통보식 화법을 쓰면서도 자신의 방식이 통보인 줄 인지하지 못하거나 본인의 방식이 오히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 배경이 있는데, 가장 흔한 이유는 ‘효율성’이다. 통보는 결정을 내린 뒤 결과만 전하면 되기 때문에 편하고 간단하다. 상대와 의논하게 되면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고 그로 인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혼자서 결정하면 그처럼 피곤한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강한 확신도 의논을 생략하게 만든다. ‘이것이 가족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결국 같은 결론이 나올 텐데 뭣 하러 굳이 물어봐’라고 과신하면 통보식 화법이 습관처럼 나올 수 있다. 가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독단적인 배려로 발현되는 것이다.
때로는 올바른 소통법이 아닌 줄 알면서도 통보식 화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과거 협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반대와 거절로 상처받거나 좌절한 경험이 있는 경우, 반대에 대한 두려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무력함 때문에 의논을 회피하게 된다. 타협은 상대를 설득할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가 필요한 행위이므로 정서적 에너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통의 문을 두드리기 쉽지 않다. 상대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할 때에도 ‘내 일이니까 내가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소통의 문을 닫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과정을 생략한 통보는 관계의 근간을 흔들기 마련이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단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서로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존중이 수용을 부른다
통보식 화법이 갈등을 초래하는 이유는 단지 결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다. 어떤 대우를 받느냐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을 스스로 통제하고 선택하기를 원하는 자율성의 욕구를 지닌다.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사전 의논 없이 결과만 전달하면 상대방은 수동적인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너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너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돼’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전해져 상처를 주기도 한다. 타협에서 배제된 소외감,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데 대한 거부감을 느끼면 누구라도 유쾌하게 협조하기 어렵다.
의논 없이 통보하면 결과가 나빠졌을 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 마음대로 해서 일을 망쳐?”,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알아서 해”라며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쉬워진다. 통보받은 사람은 자신이 동의한 적 없으므로 책임을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소사를 의논해서 결정하면 가족 공동의 선택이 되어 설령 선택한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불협화음이 덜 생기고 ‘같이 결정했으니까 같이 헤쳐나가자’는 연대감이 발휘된다.
인간의 뇌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었고 왜 이 방법이 최선인지 이해할 때 심리적 저항이 낮아져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경청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결론에 이르면 합리적으로 조율된 사안이라 인식하고,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이 들면 합의점에 이른 내용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힘이 생긴다. 혼자 결정해도 될 만큼 소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가족에게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는 습관은 상대에게 ‘내 생각을 궁금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 자존감을 높여준다.
혹 가족 중 누군가 통보식 화법을 사용한다 면 다그치거나 화내기보다 통보가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해 주자. “당신 결정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거리감과 소외감이 느껴지고, 내 존재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모두의 행복에 이르는 과정
함께 의논한 결정을 잘 이행하기 위해 최상의 합의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만큼, 가족 구성원들이 합의점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존중, 이해, 배려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이도, 가치관도, 원하는 바도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절충하여 모두를 충족시키는 결정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최선의 합의에 이를 수 있다.
타협이 원활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탓하기 쉽다. 물론 한쪽의 문제가 더 클 수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의논이 안 되는 이유는 쌍방에 있다. 양쪽의 합이 맞을 때 타결을 볼 수 있다는 전제를 생각하면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논은 통보에 비해 시간이 걸리고 복잡하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나,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타협할 때 가족은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눈을 마주하고 서로 양보하며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족은 더욱 단단해진다.
타협을 잘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의논을 망치는 요소를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논할 때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이미 답을 정해놓고 형식적인 질문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 들으려는 태도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말을 등한시하거나 상대방 의견에 흠을 잡으려는 행위는 타협이 아닌 강요다. 제대로 의논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며 어떤 결정이든 가족이 동의하는 상황이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가족에게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 좋다.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견 차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거부로 받아들이면 상황은 감정싸움으로 치닫는다. 나에게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듯 타인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타협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정도, 나아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논쟁하려는 태도 대신 한 팀으로서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의논이 끝난 후에는 “내 의견 들어줘서 고마워”, “함께 이야기 나누니 좋은 방법을 찾았네”라며 서로에게 칭찬을 건네자. 이 기분 좋은 경험이 쌓이면 더욱 성숙하게 소통할 수 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일’, ‘너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다. 누군가의 결정이 다른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한 사람의 기쁨과 어려움이 결국 모두의 몫이 된다. 그런 가족이 함께하는 대화의 장에는 아웃을 유도하는 거침없는 스매싱이 아닌,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정다운 랠리가 펼쳐져야 한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이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라는 관심과, ‘당신의 의견이 중요해요’라는 존중과, ‘우리는 한 팀이에요’라는 유대의 메시지를 모두 포함한다. 상대의 의견에 반드시 동의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함께 고민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겠다는 마음의 표현이 그 속에 있다.
때로는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가족이 함께 의논하는 모습은 단순히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가 아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건강한 가족은 서로의 목소리를 잘 듣는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라는 물음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거듭 확인한다.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