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이 필요해!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도 제각기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때 언어가 통하고 마음이 연결된다.
말은 전달되었는데 뜻이 어긋나고, 대화는 오갔는데 관계가 더 멀어지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라며 상처받은 사람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며 억울해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 더 깊은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언어는 같지만 마음은 같지 않은 것이다.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말이 안 통하면 상대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여기면 어떨까.

말과 표정, 행동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상대가 살아가는 세계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의 본질이다.

외국에 가거나 외국인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가장 먼저 드는 걱정이 ‘언어’일 것이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과 두려움은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된다. 말이 안 통하면 원하는 바가 있어도 이룰 수 없고, 고립되어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여차하면 물질적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미리 외국어를 배우거나 번역기를 준비하는 등 언어의 장벽을 낮추려 애쓴다.

그만큼 우리는 소통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라고 생각하며, 사용하는 언어가 같으면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통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법 체계로 문장을 구성하는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안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말은 전달되었는데 뜻이 어긋나고, 대화는 오갔는데 관계가 더 멀어지는 일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라며 상처받은 사람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며 억울해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 더 깊은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언어는 같지만 마음은 같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소통의 문제는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유



대화할 때 흔히 범하는 착각은 내가 한 말의 뜻과 의도를 상대방이 고스란히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이다. 인간의 인지 구조는 기계나 인공지능처럼 객관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청각을 통해 언어 정보가 들어오면 말이 오가는 맥락과 처한 상황, 상대의 표정과 억양 등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인간의 소통 방식이다.

해석하며 듣는 과정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바가 다르고, 같은 영화를 보아도 감상평이 다르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멀지 않아”라는 말을, 어떤 이는 1시간 거리로 짐작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30분 거리로 추측한다. 화자의 말에 담긴 의도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이해한 의미로 편집되는 것이다.

문제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해석이 다를 때다. 말하는 이의 의도와 듣는 이의 해석이 동일하면 소통에 차질이 없겠으나, 쌍방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소통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갈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령, 부모가 사랑과 염려에서 하는 말을 자녀는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배우자에게 선의로 건네는 말이 상대에게는 불필요한 충고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감정이 개입되면 소통의 굴절은 한층 심해진다. 신뢰가 깊은 관계에서는 다소 서툰 표현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상대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이 쌓여 있으면 상대방의 말을 곡해하기 쉽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도 불통의 주범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짜증스럽게 말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벽을 세우는 행위다. 상대로 하여금 말의 내용보다 감정에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세계에 산다



같은 말인데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 다름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 깊이 파고들다 보면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지역이나 국가 같은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자라난 환경, 받은 교육, 형성된 가치관, 축적된 경험과 기억, 감정의 총합 등이 이루어낸 내면의 궤적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 궤적이 만들어낸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대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타인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가까운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와 자녀는 한집에 살아도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성장 환경도 다르다. 부부 역시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해 성인이 되어서야 만난 사이다.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가족이 나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을 뿐이다.

대화가 뜻대로 안 될 때 우리는 상대를 답답해하곤 한다. 나만의 세계를 기준으로 나만의 언어가 표준이라 여기면 상대를 탓하기 쉽다. 누구나 ‘나’라는 세계에서 ‘나만 아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통의 원인을 한쪽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상대가 나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때로는 말이 안 통해도 “왜 그렇게 말해?”, “왜 내 말을 그렇게 알아들어?”라며 상대를 탓할 수만은 없게 된다.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그렇기에 불통과 엇갈림을 겪는 것은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말이 안 통하면 상대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여기면 어떨까. 말과 표정, 행동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상대가 살아가는 세계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의 본질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려면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듯,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과 소통하려면 상대의 생각과 말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 전에 내 말이 옳다는 전제로 설득부터 하려는 시도는 나의 세계를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것으로, 그때부터 대화는 상대의 세계를 침범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이해는 나의 세계와 상대방의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전해지거나, 상대의 말을 내가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상대를 향한 진심 어린 호기심은 이해의 열쇠가 된다. “그 말은 무슨 뜻이니?”,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뭘까?”와 같은 다정한 질문은 상대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상대를 이해하면 그의 말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해와 동의는 다르다. 이해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헤아리는 일이고, 동의는 그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상대의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아도 왜 그런 생각에 이르렀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대립각을 거두고 만나는 일은 중요하다. 비록 의견은 달라도 상대방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면 대화는 훨씬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상대를 향한 관심으로 질문하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으며 쉽게 단정하는 대신 자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상대의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여 그에 맞는 표현을 찾아내며, 상대의 말에서 숨은 의도와 맥락을 읽어내는 통역의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다. 상대가 오해하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방어하기보다 자신의 언어가 상대에게 어떻게 가닿는지 헤아린다. 이처럼 사려 깊은 태도가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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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언어의 힘을 과대평가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마음이 저절로 통하지는 않는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일 뿐, 말을 통하게 하는 것은 이해와 공감이다. 이해와 공감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연결될 때, 불완전한 언어는 비로소 제 기능을 온전히 해낸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서툴게 말해도 즐겁게 소통할 수 있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가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두서없이 하는 말을, 엄마는 곧잘 알아듣는다. 언어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렇듯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의 말을 제대로 통역하고자 하는 노력 안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당신의 세계는 나와 다르군요. 하지만 내가 알아듣고 싶어요’라는 태도로 타인에게 맞추려면 나로 가득 찬 나의 세계를 잠시 뒤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평생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므로 삶은 끊임없이 서로의 언어를 통역하는 과정과 같다. 통역의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면 나의 세계는 한 뼘씩 자라고, 타인의 세계와 따뜻한 우호 관계를 이룬다. 그곳에 평화가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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